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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상민 시인 / 둥근 삼각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5.

서상민 시인 / 둥근 삼각형

 

 

개구리 울음소리는 삼각형이다

허공의 한 소실점을 향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뾰족한 울음이

와르르 쏟아져

둥글게 들릴 뿐이다

개구리 울음을 둥글다 생각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조심해

둥근 칼날에 불면이 베일 수 있다

 

개구리 울음 같은 환약을 먹은 적 있다

목구멍 가득 차오르는 신열이

환삼덩굴을 깨우는 들판이다

행복이란 손끝에 당신을 묻히거나

나를 더는 일

각진 달들이 퍼즐처럼 끼워져

둥글게 떴다

 

저 여자의 둥근 배를 봐

뿔룩거리는 손과 발

예각의 울음이 뛰쳐나올지 모른다

 

세상에 모서리를 내준 저 늙은 등을 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떨어질 기미가 없다

 

묏등에 핀 꽃 같다

 

 


 

 

서상민 시인 / 못

 

 

살과 뼈를 태웠다

발바닥에 박힌 못이 태워지질 않았다

임진강 물결에 아버지를 보내고 왔다

 

오후 다섯 시의 태양이 풍화하는 빈방에는

오후 다섯 시의 기울기가 산다

빛 속으로 모여드는 먼지들은

빈방의 기울기를 이해한다

 

열여덟 아버지는 목수였다

톱과 대패와 망치로 지은 집이

아버지의 기운 연대다

나무에 이는 목질의 바람을 대패로 밀었다

수심이 읽히지 않는 나이테에 못을 박았다

발바닥에 못이 언제 박혔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흔들리는 땅 위에 선 아버지는 힘을 다해

중심을 버티려 했으리라

발의 통증이 퇴적된 방에는

연백에 두고 온 가족의

흑백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영토로 갔을까

 

걷는다는 건 발을 저는 일

발바닥에서 오후 다섯 시의 못이 빠져나와

긴 등뼈로 눕는다

 

 


 

 

서상민 시인 / 수평잡기

 

 

이사한 다음날

삐걱거리는 장롱의 수평을 잡기 위해

괼 만한 것을 가져오라 시켰다

딸아이는 표지가 너덜거리는

시집 두 권을 가져왔다

열한 번의 이사와

어느 날의 화재에도 살아남아

책꽂이 후미진 곳에 처박혀 있던 시집을

용케 찾아왔다

주름이 이마가 되고

물 자국이 무릎을 파먹은

어두운 안색의 시집에는

젊은 날의 소인 같은 곰팡이가 슬었고

빼꼭히 써놓은 다짐들은 먼 세월을 다해

당도한 편지 같았다

마음에 없는 여자에게 아름답다 말할 수 있고

비겁한 손을 아무 데서나 불쑥 내미는 나이에

무릎을 꿇고 이마에 뻘뻘 땀 흘리면서

어긋난 장롱 다리 밑으로

시집 두 권을 우겨 넣었다

이사한 다음날

난데없이 끌려 나온 두 권의 시집이

기울어가는 살림을 받쳐주었다

 

 


 

 

서상민 시인 / 폐타이어

 

 

타이어들이 이차선 도로 커브에 엇물려 쌓여 있다

불패의 스크럼을 짠 검은 담 같다

타이어 이빨들은 닳아 없어졌다

땡볕 아래

검은 잇몸이 악취를 뿜어낸다

달리지 못하고 엉겨 붙어 있다

서로가 서로의 속도를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고 있다

오른쪽에서 보니 왼쪽으로 무너지고 있다

왼쪽에서 보니 오른쪽으로 무너지고 있다

뒤틀린 틈 사이로

내부에 고인 어둠이 보인다

검은 담 너머에는 노란 귤밭이 없다

귤밭 너머에는 바다가 없다

급브레이크가 물고 간 아스팔트

선명한 이빨 자국에는

파리 떼가 부글거린다

머리카락이 길 한 편에 치워져 있다

납작한 몸이 길이 되고 있다

사선의 수평선 밑으로 침몰하고 있다

 

 


 

 

서상민 시인 / 새가 울다

 

 

새가 운다

우는 소리를 듣는다

새는 울지 않는다

울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울음과 울음 사이

나무가 걷는다

산이 흐른다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

눈먼 여백 속으로

새 울음소리 쏟아진다

보이지 않던 하늘이

푸르고 높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의 정체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우는 소리도

울지 않는 소리도

길이다

 

길 끝에는

풀리지 않던

내력들이 모여 있다

 

나무가 걷는다

산이 흐른다

 

침묵과 침묵 사이

새가 운다

멈춘 울음 사이

새 한 마리 날아간다

 

-2021년 계간『문예바다』겨울호 신인상 등단시

 

 


 

 

서상민 시인 /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길고 흰 손

그 손가락으로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암막의 무대 위를 날아다니다

한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비처럼

잘못 든 길에서 마주친

우연한 나비처럼

 

비상에는 이유가 없고

심장에는 향방이 없네

 

양들의 입술 위에 얹힌 나비처럼

믿고 싶은 거짓말처럼

검은 심장에 피가 도네

가면을 쓴 마술사의 눈을 피할 수 없네

 

눈이 내리네

눈썹 위에 내려앉은 나비가

주르륵 눈물로 흩어지네

 

단 하나의 주문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마술사처럼

거짓말을 믿기 위해

날개를 다친 나비처럼

 

공연이 끝나고

마술사가 떠나네

흰 박수 소리 등 뒤에 파닥이네

죽은 나비들이 테이블 위에 쌓이네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시인동네,2022)

 

 


 

 

서상민 시인 / 마술사의 탄생

 

 

사람은 자기 이름을 갖고 태어난대. 맨 처음 세상에 올 때 울음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거래. 백화점이나 아울렛 선반에 웅크린 검은 모자들처럼 울음 속에는 바코드가 찍혀 있대. 바코드에는 푸른 녹이 핀 옛 지도들과 살아가야 할 날들의 온갖 예언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대. 부모가 울음소리를 듣고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 이름을 짓게 되는 거래.

 

유난히 울음소리가 작아 그게 혼잣말인지 휘파람인지 혹은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세상 밖의 말들인지 구별이 안 가는 경우가 있대. 제아무리 쫑긋 귀를 세워도 요지부동의 어둠일 뿐, 이름은 들리지 않고, 그만 당황한 나머지 탯줄 자르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잘못된 이름을 붙이게 된대. 그런 아이가 자라서 마술사가 되는 거래.

 

마술사의 주문은 어긋난 운명을 되돌리기 위한 슬픈 노래래. 검은 모자에서 흰 토끼를 꺼내거나, 손수건에서 붉은 장미를 피워내는 건 거짓으로 얼룩진 저주를 풀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래. 그런데 사람들은 마술사의 주문을 거짓이라 믿는대. 거짓과 진실의 경계에서, 단 하나의 거짓말을 완성하기 위해 마술사는 일생을 바치게 되는 거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술사는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탯줄을 검은 망토 속에 감추고 있대. 탯줄을 타고 몸 밖으로 똑똑 피가 빠져나가 얼굴이 늘 창백한 거래. 마술사의 피를 머금고 탯줄은 무럭무럭 자란대. 그렇게 자라서 구름을 뚫고 뭉게뭉게 하늘에 닿는 날, 마술사는 탯줄을 타고 슬프고 아름다운 지상에서 증발해 버린대.

 

마술사의 입꼬리 같은,

그믐달이 붉게 피를 토하는 밤,

그런 밤,

세상 어딘가에서 일생일대의 주문을 완성한 마술사가 다시 태어나는 거래.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시인동네,2022)

 

 


 

서상민 시인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한국외대 독일어과 졸업. 2021년 계간 『문예바다』겨울호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이 있음. 김포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