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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효선 시인 / 지다 아니, 진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0.

김효선 시인 / 지다 아니, 진다

 

 

흐린 하늘 아래

벚꽃이 핀다 아니, 진다

그 아래

강아지 한 마리 누워 있다

아니, 아이가 서 있다

아니, 떨어진 코트를 입은 노인이 서 있다

얼음으로 빚은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벚나무 아래

내가 마법을 걸어놓고 잠들어버린 오후,

이제 마악 흑백사진으로 인화된다.

 

 


 

 

김효선 시인 / 민들레

 

 

 여자가 구석에 세워두었던 시간을 깬다.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끝을 손목에 들이댄다. 구인광고와 구직광고 사이 방 있음과 방 구함 사이, 모래알맹이를 삼키던 여자 계단을 오르던 여자의 관절은 쿠르릉, 쿠르릉 밀려오는 먹구름 소리를 듣는다. 여자는 몸을 날려 못처럼 박히고 싶었다. 비가 그쳤을 때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의 푸른 레인코트를 보았다. 몽골 대륙 어디쯤에선가 흙바람이 불어왔다. 어디로 가는 길일까 여자의 푸른 레인코트는 묻지 않았다. 노란 단추 몇 개가 꽃을 피우려는지 꿈틀대는 것 같았다.

 

 여자는 대지의 후손이었을까.

 

 


 

 

김효선 시인 / 우울한 실루엣

 

 모르겠습니다 참말로 모르겠습니다 조각난 아침이 유리병 안에 갇힌 우울한 실루엣 그 빌어먹을 실루엣 때문에 칼날에 꽂힌 사과 한조각 우물거리며 칼날과 사랑은 서툴게 아찔하게 이 겨울을 넘기고 있다고 유리병 안에 갇힌 우울한 실루엣 그 빌어먹을 실루엣 때문에 돌아서 가는 길은 낯선 도시의 불빛처럼 막막하기만 하다고 내 눈앞에서 죽음은 너무 쉽다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만삭된 아내의 늪처럼 허우적대는 이 겨울 그 빌어먹을 실루엣이 자꾸만 뒤통수를 치며 달려듭니다 차갑게 달궈진 오래된 빛깔, 상처

 


 

​김효선 시인 / 아내의 동굴

 

 

 밤마다 소화불량에 걸린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입니다. 나는 그런 아내의 꼬리를 자르며 잠이 듭니다. 아내, 안에 내 아내의 안에는 모래언덕으로 달아나는 꼬리 잘린 도마뱀이 살고 있습니다. 부서져 내리는 곳이라면 기를 쓰고 오릅니다. 참 이상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오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그런 곳을 도마뱀은 좋아합니다. 모래 안에 숨어 있는 걸 좋아합니다. 그 서늘함, 강렬한 태양도 뚫지 못하는 모래동굴 안 그 안에 아내가 삽니다. 나는 밤마다 아내의 꼬리를 자르며 잠이 듭니다

 

 


 

 

김효선 시인 / 어머니의 노래

 

 

 어머니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입에 달고 다녔어요. 밭고랑으로 걸어갈 때도 있어요. 가끔씩 태양이 노랗다고 나에게 총을 겨누기도 하지요. 내 아이의 집은 동그랗고 노랗게 생겼어요. 어디선가 자귀나무 냄새가 나요. 아니 자귀나무 바람이 불어요. 아버지는 보이지 않아요. 어머니는 노을이 넘어갈 때도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불러요. 귀를 막아도 어머니의 노래는 계속 되어요. 태양은 절대로 노란색이 아니라고 악을 써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노란 태양을 꼴깍거리며 잡아먹어요. 또 자귀나무 바람이 불어요. 동그랗고 노랗게 생긴 내 아이의 집은 자귀나무 숲에 있어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자귀나무 숲으로 걸어가요. 더 이상 자귀나무 바람이 불지 않아요.

 

 


 

김효선 시인

제주도 서귀포시 출생. 2004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이 있음. 200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헤. 시와 경제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현재 제주대학교 강사. 다층문학동인, 빈터 동인. KBS 제주방송국 편성제작국 작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