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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순현 시인 / 내 몸처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3.

이순현 시인 / 내 몸처럼

 

 

보내주신 글 잘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뿌리까지 고스란히 읽어낼 수 없어

메스로 글 하나하나를 절개합니다

절개면은 또다른 겉이 되고

또 다른 메스를 부릅니다

여기저기서 도려내고 가르다보니

솟구치는 피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엉겹결에 헤쳐놓은 글들을 한꺼번에 쓸어넣고

질긴 실로 촘촘하게 기웠습니다

흉터투성이 글의 가장자리에

둥근 고리를 꿰고

몸의 열기로 여는 좌물쇠를 달아둡니다

잠긴 것을 열 때마다

달아오르는 지문으로 더듬습니다

실어보내신 의미를

환하게 열 수는 없을 것 같아

내 몸처럼 어디든 챙겨들고 다닙니다

 

 


 

 

이순현 시인 / 나는 여기 피어 있고

 

 

         몸 안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짚어보는 어디든

         지느러미의 퍼덕거림이 만져진다 물고기는 꽃을 통해

         다른 세게로 이동해간다 인간의 꽃은 구순과 음순에서

         피어난다 말과 몸은 한배를 타고난 형제다

 

가랑이 사이에 기저귀를 대고

수년째 누워 있는 어머니,

음부는 움푹 패여 컴컴하다

푹 패인 그 주변에는

허옇게 센 음모가

드문드문 지키고 있다

 

한 필생의 바닥에는

태반이 떨어져 나간 분화구들이

무수하게 패여 있을 거야

 

손길이 다 닿지 않는 잔등처럼

다 닿을 수 없었을 기슭,

 

아직 피지 않은 꽃들 있을까

산벚꽃 몽우리처럼 다닥다닥 매달려 있을까

 

이년아 밥 안 주냐!

 

엄마 빨리 와봐

할머니 또 똥 쌌어

 

아줌마는 어디서 왔어요?

 

꿈지럭꿈지럭 이불을 끌어당기는

손아귀의 힘줄 끄트머리마다

손톱들이 숟가락처럼 앙칼지게 박혀 있다

 

 


 

이순현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199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몸이 유적이다』(문학동네, 2002), 『있다는 토끼 흰 토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