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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유 시인 / 겹을 풀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3.

박소유 시인 / 겹을 풀다

 

 

붉다는 것만으로 치명적일 때가 있다

능수벚꽃은

마음을 무장하지 않고는 볼 수 없다고

꽃잎 때문에 살을 감쳐

아득히 길을 잃었다고

병을 얻었다고 그가 말했을 때

이 붉은 꽃 그늘 아래, 함께 앓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겹만 풀면 환할 몸에 겹을 쌓으며

마음이 만들어낸 병은 깊고 무거운데

단명의 꽃들은 얼마나 가벼운가

붉은 눈, 겹겹이 허공에 봉안한 뒤

화르르 쏟아져 내린 세상의 꽃잎들이

진창만창 놀다 간 뒷자리, 붉게 젖었다

사랑도 때를 알고 겹을 푸는 것

 

 


 

 

박소유 시인 / 그 나무

 

 

나무 한 그루 있다

영안실 뒤쪽

오래전부터 그 자리였다

이 방, 저 방

환풍기가 소용돌이치며 내보내는

울음과 국밥 냄새를

저 혼자 다 받아내고 있다

죽음의 일별이

더 가벼워질 수 있도록

나뭇잎이

종일 손 흔들때도 있다

 

잘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울음보다

더 오래 따라오던 국밥 냄새

잠시 머물러도

다 내 것이 되는

구구절절 사연들

죽음은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져

손 흔들고 있다가도

어떤 날은

내 곁에 와 누울 때도 있다

 

-시집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에서

 

 


 

박소유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0년 《현대시학》 당선. 시집 <사랑 모르는 사람처럼> <어두워서 좋은 지금>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