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유 시인 / 겹을 풀다
붉다는 것만으로 치명적일 때가 있다 능수벚꽃은 마음을 무장하지 않고는 볼 수 없다고 꽃잎 때문에 살을 감쳐 아득히 길을 잃었다고 병을 얻었다고 그가 말했을 때 이 붉은 꽃 그늘 아래, 함께 앓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겹만 풀면 환할 몸에 겹을 쌓으며 마음이 만들어낸 병은 깊고 무거운데 단명의 꽃들은 얼마나 가벼운가 붉은 눈, 겹겹이 허공에 봉안한 뒤 화르르 쏟아져 내린 세상의 꽃잎들이 진창만창 놀다 간 뒷자리, 붉게 젖었다 사랑도 때를 알고 겹을 푸는 것
박소유 시인 / 그 나무
나무 한 그루 있다 영안실 뒤쪽 오래전부터 그 자리였다 이 방, 저 방 환풍기가 소용돌이치며 내보내는 울음과 국밥 냄새를 저 혼자 다 받아내고 있다 죽음의 일별이 더 가벼워질 수 있도록 나뭇잎이 종일 손 흔들때도 있다
잘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울음보다 더 오래 따라오던 국밥 냄새 잠시 머물러도 다 내 것이 되는 구구절절 사연들 죽음은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져 손 흔들고 있다가도 어떤 날은 내 곁에 와 누울 때도 있다
-시집 『너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순현 시인 / 내 몸처럼 외 1편 (0) | 2022.11.13 |
---|---|
우원호 시인 / KISS 5 외 1편 (0) | 2022.11.13 |
김창완 시인 / 용서 외 1편 (0) | 2022.11.13 |
이영혜 시인 / 종의 기원 1 외 1편 (0) | 2022.11.12 |
조창환 시인 / 나비와 은하 외 1편 (0) | 2022.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