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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춘 시인 / 소리의 데몬스, 벌레들의 방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3.

이영춘 시인 / 소리의 데몬스, 벌레들의 방

 

 

1

 

고요가 흐르는 소리, 고요의 빗소리와 어둠과 적막과 정령들의 숨소리와

숨소리들이 공간을 끌고 다니는 소리, 공간이 어둠을 채우는 소리

데몬Demon, 나의 데몬스, 절망의 끝에 이르는 데몬스,

배신의 끝에 이르는 데몬스, 머릿속에 입력된 이름을 하나씩 삭제한다

삭제는 죽음이다 죽음은 정지다 머릿속에서 바퀴 속에서

정령을 끌어안고 고요가 흐르는 소리를 끌어안고 나는 나를 장사지낸다

빗소리 속에서, 문지방 위에서 내가 묻히는 방, 마침표가 점철되는 방

 

2

 

어제는 자장면을 배달 시켜 먹고

오늘은 ‘백종원의 역전우동’을 배달 시켜 먹고

내일은 오징어 덮밥을 배달 시켜 먹고

비스듬히* 정말로 비스듬히 아무것도 없는 무형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하루살이처럼 날고 있다

어제 하루살이는 죽음의 웅덩이로 돌아가고

오늘 하루살이는

미생물의 웅덩이에서, 오래 묵은 벽장 속에서, 벽장 속 곰팡이처럼

아픈 세상이다 카오스다

집단으로 공동으로 날개 잘린 벌레들의 방,

침대 모서리, 책상 모서리, 컴퓨터 모서리에 붙어 겨우 기생하는

21세기 동족의 방, 공존의 방!

더듬더듬 먹을 것을 찾아 기어가는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 같은

벌레들이 간헐적으로 숨 고르는 소리,

눈 감고 입 막은 세상이 구름처럼 떠 간다

 

*전기철시인의 작품 ‘삼천포’에서 인용.

 

계간 『시와 세계』 2022년 여름호 발표

 

 


 

이영춘 시인

197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시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 놓고』, 『네 살던 날의 흔적』, 『슬픈 도시락』』,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와 시선집『들풀』『오줌발,별꽃무늬』 등이 있음. 윤동주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인산문학상. 강원도문화상. 동곡문화예술상. 한국여성문학상. 유심작품상 특별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