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자미 시인 / 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14.

권자미 시인 / 줄

 

 

베란다 난간

응달을 타고 오른 나팔꽃이

손가락 없는

덩굴손을 허공에 얹는다

높은 곳으로 외가닥 줄을 대는 중이다

V자 그리며 지상으로 왔으나

파리하게 입술이 타들어 오그라졌으므로

나도 그랬다

위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시집 『지독한 초록』 에서

 

 


 

 

권자미 시인 / 아마도 상처

 

 

귀를 접고 나는 순해진다

 

날카로운 유리병 조각 파도에 이끌려다니며 무던해진다

모래 속에 투명한 보석이 된 후

 

매일 사랑을 생각한다

조금씩 부서지면서

 

마모되는 것들은 은은하게 깊어지는 것

 

귀는 자란다

시멘트 바닥에 한쪽 귀를 문대는 동안에도 증식하듯

 

장천을 굴러굴러 달은

목젖이 새파랗도록 모서리를 깍는데

뾰족하게 자라는 귀 다섯을 접느라

별은 또 별대로 모여 밤마다 자그락거린다는군

 

파도가 부서진다​

부서진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야

우리는 맹세처럼 단단해진다

 

그는 나를 안을 수 없다

이미 팔이 부서졌으므로

 

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눈꽃빙수를 먹을 때

얼음은 얼음을 풀고

유리잔을 말갛게 통과한다

 

멀리 사람 사는 마을까지 와

바다는 귀를 깎고

기를 꺾고

마침내 둥글어진다

 

계간 『시와 사람』 2015년 가을호 발표

 

 


 

 

권자미 시인 / 청계천 금치기

 

 

청계천 지나다가 시집을 샀다

백석 이상 칼지브란 김수영 황지우

한 묶음에 3000원이다

 

며칠 면도 잊은 늙수레한

헌책방 주인 거스름돈 거슬러 주며

이건 종이 값도 아녀 했다

 

책 속에 바짝 마른

냉이 꽃 세 송이 꽂혀있다

 

헌책에 압화(壓化) 부록으로 끼울 리도 없고

(종이 값도 아니라면)

詩값 제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드러난 꽃값

도대체 얼마란 소린가

 

시인의 말에

꽃 눈물 번져있다

 

-권자미 시집 『지독한 초록』

 

 


 

권자미 시인

1967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2005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독한 초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