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 줄
베란다 난간 응달을 타고 오른 나팔꽃이 손가락 없는 덩굴손을 허공에 얹는다 높은 곳으로 외가닥 줄을 대는 중이다 V자 그리며 지상으로 왔으나 파리하게 입술이 타들어 오그라졌으므로 나도 그랬다 위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시집 『지독한 초록』 에서
권자미 시인 / 아마도 상처
귀를 접고 나는 순해진다
날카로운 유리병 조각 파도에 이끌려다니며 무던해진다 모래 속에 투명한 보석이 된 후
매일 사랑을 생각한다 조금씩 부서지면서
마모되는 것들은 은은하게 깊어지는 것
귀는 자란다 시멘트 바닥에 한쪽 귀를 문대는 동안에도 증식하듯
장천을 굴러굴러 달은 목젖이 새파랗도록 모서리를 깍는데 뾰족하게 자라는 귀 다섯을 접느라 별은 또 별대로 모여 밤마다 자그락거린다는군
파도가 부서진다 부서진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야 우리는 맹세처럼 단단해진다
그는 나를 안을 수 없다 이미 팔이 부서졌으므로
우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눈꽃빙수를 먹을 때 얼음은 얼음을 풀고 유리잔을 말갛게 통과한다
멀리 사람 사는 마을까지 와 바다는 귀를 깎고 기를 꺾고 마침내 둥글어진다
계간 『시와 사람』 2015년 가을호 발표
권자미 시인 / 청계천 금치기
청계천 지나다가 시집을 샀다 백석 이상 칼지브란 김수영 황지우 한 묶음에 3000원이다
며칠 면도 잊은 늙수레한 헌책방 주인 거스름돈 거슬러 주며 이건 종이 값도 아녀 했다
책 속에 바짝 마른 냉이 꽃 세 송이 꽂혀있다
헌책에 압화(壓化) 부록으로 끼울 리도 없고 (종이 값도 아니라면) 詩값 제하고 고요하고 쓸쓸하게 드러난 꽃값 도대체 얼마란 소린가
시인의 말에 꽃 눈물 번져있다
-권자미 시집 『지독한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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