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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너무 늦은 오월의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8.

김왕노 시인 / 너무 늦은 오월의 노래

 

 

 아도니스, 사람은 쓸쓸해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 우리 둘이 다니면 늘 혼자였던 태양의 질투가 이글거리며 햇살을 따갑게 보내지만 둘이서 사랑으로 불타오를 때 태양은 우리 사랑이 영원하도록 뜨거운 주문을 외운다. 아도니스, 그런다고 우리가 태양에 머리 숙이고 살 수 없다. 우리에게도 갈 길이 있고 우리도 늘 고집하며 부르는 노래는 있어야 해. 아도니스 마주보면 고압이 찌릿찌릿 흐르는 눈동자가 있어야 해

 

 불멸을 고집하는 것도 결국 광활한 우주에서 광음의 그늘에서 단명이라는 것을 알아, 우주마저 언젠가는 신이 걷어치울 거적 같은 것인지 몰라. 그러나 단명일수록 생은 달콤해야 해. 사랑은 뜨거워야 해. 도파민이란 물질이 수시로 몸에 넘치고 달빛에 물든 수면을 두드리며 산란하는 물고기처럼 죽어도 좋다며 아득한 오르가슴에 이르러도 돼. 그리운 것은 마음껏 그리워하며 불러야 해. 내숭이란 끝내 암호 같아 슬픈 것, 아도니스, 오래 고개 숙인 풀꽃 같은 아도니스, 아도니스

 

 아도니스, 사람의 발명품 중 가장 귀한 것이 전기도 자동차도 아니었다. 유형이 아닌 무형이나 사람을 지배하는 사랑이었다. 사랑을 빌미로 온갖 악행이 난무했으나 순수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맑은 강물 같은 것이다. 원래 사랑엔 장식품이나 죄의 티끌이나 기미 하나 없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고 새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사랑이고 진주보다 목숨보다 귀한 것이 사랑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배우면 세상 모든 학문이 무가치라는 것을 안다. 아도니스, 우리 그런 사랑에게로 가자. 야반도주 하듯 가자. 질경이 같은 꽃 걸음이라 너무 더디더라도 몽유의 밤 같아도 혼자는 길을 잃지만 둘이면 잃을 수 없는 것이 길의 비밀이다. 혼자 가면 길을 낼 수 없으나 둘이 가면 길이 생기는 것이 길의 비밀이다. 세상 모든 길의 본질은 결국 사랑에 이르는 것이다. 1번국도 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풋사과도 사랑의 길인 1 번 국도를 밝히려 매단 등 같은 것이다.

 

 아도니스, 세상 모는 사랑은 왜 퇴화 되어 가는지. 왜 자꾸 결핍의 눈동자로 허망해 지는지. 사랑학개론은 왜 자꾸 인기가 없어지고 사랑이란 이념은 왜 고리타분하다는 평가를 학계에서 내리는지. 사랑이란 발명이 인류최악의 발명품이란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지. 한 때 사랑을 위해 전쟁을 했지만 지금은 죽음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 같아. 사랑이란 경전처럼 큰 경전이 없는데 아득한 사랑이여. 멀고 먼 아도니스여, 이제 한 번 쯤 돌아보아야 할 사랑의 살림살이가 아니냐. 불러야 할 사랑의 노래고 해야 할 장미 같은 붉은 사랑이 아니냐.

 

 아도니스, 사랑만큼 효능 좋은 만병통치약은 없다. 사랑을 믿지 않으므로 버려진 사랑이 썩어 구더기 들끓고 파리가 우우 날아오르는 일은 정말 없어야 한다. 수시로 몰아닥치는 한파, 거역할 수 없어 몰아쳐 오는 태풍, 싹이 돋기 전에 입는 냉해는 더 강한 사랑을 위한 담금질이라 생각하자.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집안을 환히 밝히고 늦은 저녁을 차리는 것은 사랑 밖에 없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넘어지지 말라 지주 같은 말씀을 주는 것도 사랑 밖에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의 뿌리고 잎이고 줄기다. 모든 것의 알파고 오메가다.

 

 아도니스, 사랑을 외치는 사람은 결코 멸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사람이 저지른 끔찍한 일은 사람을 절망과 도탄에 빠뜨린다. 사금파리 같이 날 선 둘이 만나 부딪혀 새파란 불똥이 아름답게 튀듯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민간요법으로 사랑을 만들어도 되고 일단 혼자인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사랑이 시작되고 세상을 사랑으로 적시는 사랑의 발원지가 된다. 검룡소의 맑은 물처럼 맑은 사랑이 끝없이 흘러 마른 뿌리를 적시며 사랑의 뒷물이 되어 찰랑거린다. 흘러가는 사랑으로 우듬지까지 꽃핀 아카시아 숲에 벌이 잉잉거린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을 사랑이 일군다.

 

 우리는 일찍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역경 사서삼경을 배웠지만 실은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먼저 배웠다. 사랑의 발명품 중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 플라토닉 사랑 등 많은 것이 있으나 어머니가 준 사랑이 사랑의 불씨, 모든 사랑의 씨앗이고 가장 순수한 사랑이라 어머니 사랑을 가지고 어디로 가나 누구를 만나나 가장 고귀한 사랑이 된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사랑의 전달자고 의무감을 가진 것이다. 아도니스, 내 궤변이 세상 사랑에 어떤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 모든 과정을 사랑이 발효되는 시간이라 하자. 아도니스 네 생각도 내 생각 전반에 흐른다고 하자.

 

 아도니스 지금은 바람에 보리밭 물결치고 있다. 종달새가 높이 치솟아 우짖는다. 한 배의 새끼를 낳은 까투리를 거느린 장끼의 울음소리 얼마나 청아하며 기고만장한가. 아도니스 말이다. 조금 부끄러운 말이지만 밤이 오면 술패랭이꽃 지켜선 보리밭으로 우리 함께 가서 넘어지자. 그 뒤의 일은 상상에 맡기고 풀어헤친 옷고름 여미는 너의 등을 다독이는 달빛, 우리 묵정밭 같은 세상을 갈아엎거나 어둠 무성한 세상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자. 옥수수 익고 감자알이 실할 때 너는 여우같은 아내가 되어 토끼 같은 새끼를 낳으면 지은 죄도 없으며 자꾸 죄스러워 나는 마당에 서성이며 헛기침을 해도 좋다. 머리 긁적이는 덜떨어진 사내라도 좋다. 아, 그런 사랑이라면 순수해서 좋다.

 

 아도니스, 지구가 기울어졌으나 결코 뒤집히지 않는 것은 사랑이란 부력 때문, 진작 블랙홀로 빨려들어 가야하나 빨려들지 않는 것은 태양계에 가득한 풀벌레의 노래, 바람의 노래, 바다와 산맥이 어우러진 노래, 별과 어둠이 빚어내는 노래, 아아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노래가 가릉빙가의 날개, 붕새의 날개, 오로라보다 더 큰 지느러미가 되어 끝없이 퍼덕이기 때문이다. 사랑할수록 고음으로 치닫는 늦은 우리의 노래, 오월의 노래 때문이라고 하자, 아도니스여, 아도니스의 노래여, 아도니스의 사랑이여

 

 


 

 

​김왕노 시인 / 내게도 이제 너라는 중력이 생겼다

 

 

내 몸이 지구에서 멀리 튕겨나가지 않는 것은

지구가 돌아가며 생기는 원심력과 구심력도 아닌

너라는 중력이 있기에 방랑벽이 있는 내가

밀항선을 타고 싶은 내가 개 복숭아나무와 함께

이 언덕에 있는 것도 너라는 중력 때문이다.

죽은 나무 같은 내게 새로운 잎처럼 돋는 꿈은

너라는 중력을 뿌리치려는 내 안간힘이다.

 

바람을 보면 바람의 대열에 끼여 민들레 꽃씨

하얗게 휘날리는 언덕을 넘어 십자군원정을 떠나듯

왜 떠나고 싶지 않았겠나. 옥수수 익어가는 전방

산 까치 우는 너와집의 감나무를 스쳐

북진하는 바람으로 실향민 내 어머니 고향인 함흥

시과 꽃 피는 과수원에 떠돌고도 싶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넌 나를 붙잡아 두려 애원하는 중력

 

한 때는 너라는 중력을 뿌리치고 마른 벌판을 적시는

한 줄기 강물로 벌판을 채운 풀꽃의 문장

끝물의 벌판에서 새파란 하늘로 피어오르는 죽정이 태우는

쥐불연기로 늦은 공부를 하며 나를 흘러라 재촉하는 강물

뼛골까지 사막화된 내 마른 이념이 강물이란 이념으로

누대서 흘러온 시퍼런 강물로 파란만장으로 흐르고 싶어도

너는 나를 달래고 조이는 내 영혼의 고삐, 너라는 중력

 

별똥별 하나 머리에서 일획을 그으며 왜 질주본능이

내게도 살아나지 않겠나. 하얀 수피의 자작나무 숲을 스쳐

삼꽃 피는 밭에 떨어진 운석으로 누군가의 행운이 되도 좋고

일순간 타오르며 하늘을 아름답게 수를 놓듯 내 생도 한번 쯤

자연 발화하듯 활활 타오르며 화양연화를 노래해도 좋은데

날라리 불고 불며 이 세월 넘어가도 좋지만 너라는 현실

너라는 중력, 너라는 사랑이 끝내 내게 작용하는 중이다.

 

저 어둠을 철거덕거리는 바퀴소리로 끝없이 헤치며 떠나는

기차차창에 기대 스쳐가는 철길 가에 등처럼 푸른

풋사과를 보며 내 청춘이 까까머리고 마땅히 갈 곳 없어도

굿바이, 굿바이 손 흔드는 것이 내 젊은 날의 오기고

떠나므로 점점 내게 더 강하게 작용하는 너를 느끼려는 것

하나 내 푸념은 철없고 덜 떨어진 사람의 궤변이거나 옹알이

오늘도 가만히 감싸는 너라는 중력이 가득 찬 아름다운 세상

 

웹진 『시인광장』 2022년 7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1957년 경북 포항 동해 출생. 공주교대 졸업. 아주대학원 졸업.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등이 있음. 2003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년 제7회 박인환 문학상, 2008년 제3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등 수상. 현재 웹진『시인광장』 편집주간,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