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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란 시인 / 오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8.

이정란 시인 / 오이

 

 

오이를 반으로 잘랐다

한쪽은 줄기에서 왔고 한쪽은 꽃에서 왔지만

오이는 줄기도 아니고 꽃도 아니다

허공도 아니고 바닥도 아니다

 

오이를 키운 건 줄기차게 서로를 부정하는 반대방향

 

다섯 조각으로 잘린 경우

오이는 앞뒤 열 개의 원반을 갖는다

미로는 원반 바깥으로 길을 이었다

 

오이 조각을 버리고

원반 안으로 미로를 가지고 들어가는 경우

 

멈추지 않는 회전체

셀 수 없는 층의 타래

켜켜이

 

빛은 어둡고 고요는 무거워

빛에 빛을 첨가하고

고요에 소음을 뿌린다

 

소음으로 이루어진 내 몸속 쓴맛으로 오이는 영근다

 

의심으로 오이와 연결된

나는 이미 반으로 잘려

조용히 죽어 있는 칼을 내려다본다

 

―《시산맥》 2021년 가을호

 

 


 

 

이정란 시인 / 나무의 기억력

 

 

책장에 온갖 책을 넣고 긴 세월을 함께 지냈다

층층이 올린 짐을 잘 버텨주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책장이 내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그 소리는 깊은 산 속에서 빗소리와 햇빛에 감응하고 절망을 글썽이던 잎과 줄기의 기억에 가 닿게 하였다

 

결 사이에 압축되어 있는 바람과 하늘

옹이에서 빛나는 마음눈도 보았다

 

애초 마음을 끌었던 빛깔과 향이 새를 위해 어깨를 내주었던 품새라는 걸 뒤늦게 알고  한동안 숲에 잠겨 있었다

숲을 놓지 않는 나무의 기억력이 무거움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

 

나뭇가지 위에서 죽어간 새가 콕콕, 마음눈을 아프게 쫀다

 

-시집 <나무의 기억력> 2008. 종려나무

 

 


 

이정란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199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어둠ㆍ흑맥주가 있는 카페』(들꽃, 2001)와 『나무의 기억력』(종려나무, 2007), 『눈사람 라라』 『이를테면 빗방울』이 있음. 계간 『詩로 여는 세상』 편집장으로 활동 中.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지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