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란 시인 / 오이
오이를 반으로 잘랐다 한쪽은 줄기에서 왔고 한쪽은 꽃에서 왔지만 오이는 줄기도 아니고 꽃도 아니다 허공도 아니고 바닥도 아니다
오이를 키운 건 줄기차게 서로를 부정하는 반대방향
다섯 조각으로 잘린 경우 오이는 앞뒤 열 개의 원반을 갖는다 미로는 원반 바깥으로 길을 이었다
오이 조각을 버리고 원반 안으로 미로를 가지고 들어가는 경우
멈추지 않는 회전체 셀 수 없는 층의 타래 켜켜이
빛은 어둡고 고요는 무거워 빛에 빛을 첨가하고 고요에 소음을 뿌린다
소음으로 이루어진 내 몸속 쓴맛으로 오이는 영근다
의심으로 오이와 연결된 나는 이미 반으로 잘려 조용히 죽어 있는 칼을 내려다본다
―《시산맥》 2021년 가을호
이정란 시인 / 나무의 기억력
책장에 온갖 책을 넣고 긴 세월을 함께 지냈다 층층이 올린 짐을 잘 버텨주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책장이 내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그 소리는 깊은 산 속에서 빗소리와 햇빛에 감응하고 절망을 글썽이던 잎과 줄기의 기억에 가 닿게 하였다
결 사이에 압축되어 있는 바람과 하늘 옹이에서 빛나는 마음눈도 보았다
애초 마음을 끌었던 빛깔과 향이 새를 위해 어깨를 내주었던 품새라는 걸 뒤늦게 알고 한동안 숲에 잠겨 있었다 숲을 놓지 않는 나무의 기억력이 무거움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
나뭇가지 위에서 죽어간 새가 콕콕, 마음눈을 아프게 쫀다
-시집 <나무의 기억력> 2008.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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