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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현채 시인 / 자화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9.

이현채 시인 / 자화상

 

 

로자,

나의 룩셈부르크는

원본 없는

이미지

 

그 자체로 현실을 대체하는

이미지에 의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매트릭스

 

로자,

나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여자,

울퉁불퉁한

과거의 어머니

 

*로자 룩셈부르크 : 민주주의를 수반하지 않은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독재라고 레닌을 비판했던 여성 혁명가, 지난 2019년은 아무도 기 념하지 않았던 로자 룩셈부르크 사망 100년이 되는 해.

 

- 계간 《시사사》 2021년 가을호

 

 


 

 

이현채 시인 / 떠도는 그림자들

 

 

1

 

목련 이파리가 두, 두둑, 떨어지는 밤이다

빗소리가 들리고

 

벚꽃이 지고

라일락이 피고

 

봄 속에서 죽는 정령들의 밤이다

스, 스슥, 슥

 

죽음은 늘 밤의 경계를 떠돈다

저수지 바닥 수면까지 가라앉았을 때, 순간 누군가 손을 내민다. 홍역 으로 붉은 죽음의 철조망에서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낯선 손님이 다녀간다. 깡말라서 눈만 커다란 아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아이는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나고

 

스스로 고립되어 귀와 입을 닫은 채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빗소리가 들리고

밤이고

 

어느 시인의 갑작스런 부고장처럼

꽃잎은 창밖으로 떨어지고

 

빗소리 들리고

우수수

꽃잎이 떨어지고

 

2

 

나올 줄을 몰랐다.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따라 바다로 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꽃은 피고 새들의 지저귐은 들렸지만, 아이들의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던 놀이터는 텅 비어 있고, 말을 잃은 사람들이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다로 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깊은 밤

깊은 바다.

깊은 수면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따라 바다로 간 아이들은

 

3

 

이팝꽃이 피었다.

 

사이버들의 세상. 학교도 교회도 폐쇄되었다. 친구간의 만남도 단절되었다. 마스크 없이는 밖을 나갈 수 없다. 안내 문자가 삐삐 날아들 때마 다 몸에 소름이 오싹한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의 공포로 몸살을 앓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좀 잠잠해지는가 했는데, 이태원 클럽의 단체 확진자가 발발, 전국이 또 비상에 돌입하고, 긴장의 연속이다.

 

까뮈의 페스트를 읽는 밤이고

신종 바이러스 코르나-19 가 잠잠해지기를

기도하는 밤 빗소리가 들린다.

 

절정을 이루었다 떨어지는

흰 꽃잎들

 

 


 

이현채 시인

1967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 2008년 《창작21》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지혜사랑, 2011), 『시뮬라시옹』(한국문연, 2020) 이 있음. 한국시인협회와 <현대시회> 회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