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채 시인 / 자화상
로자, 나의 룩셈부르크는 원본 없는 이미지
그 자체로 현실을 대체하는 이미지에 의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매트릭스
로자, 나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여자, 울퉁불퉁한 과거의 어머니
*로자 룩셈부르크 : 민주주의를 수반하지 않은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독재라고 레닌을 비판했던 여성 혁명가, 지난 2019년은 아무도 기 념하지 않았던 로자 룩셈부르크 사망 100년이 되는 해.
- 계간 《시사사》 2021년 가을호
이현채 시인 / 떠도는 그림자들
1
목련 이파리가 두, 두둑, 떨어지는 밤이다 빗소리가 들리고
벚꽃이 지고 라일락이 피고
봄 속에서 죽는 정령들의 밤이다 스, 스슥, 슥
죽음은 늘 밤의 경계를 떠돈다 저수지 바닥 수면까지 가라앉았을 때, 순간 누군가 손을 내민다. 홍역 으로 붉은 죽음의 철조망에서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낯선 손님이 다녀간다. 깡말라서 눈만 커다란 아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아이는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나고
스스로 고립되어 귀와 입을 닫은 채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빗소리가 들리고 밤이고
어느 시인의 갑작스런 부고장처럼 꽃잎은 창밖으로 떨어지고
빗소리 들리고 우수수 꽃잎이 떨어지고
2
나올 줄을 몰랐다.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따라 바다로 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꽃은 피고 새들의 지저귐은 들렸지만, 아이들의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놀던 놀이터는 텅 비어 있고, 말을 잃은 사람들이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다로 간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깊은 밤 깊은 바다. 깊은 수면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따라 바다로 간 아이들은
3
이팝꽃이 피었다.
사이버들의 세상. 학교도 교회도 폐쇄되었다. 친구간의 만남도 단절되었다. 마스크 없이는 밖을 나갈 수 없다. 안내 문자가 삐삐 날아들 때마 다 몸에 소름이 오싹한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의 공포로 몸살을 앓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좀 잠잠해지는가 했는데, 이태원 클럽의 단체 확진자가 발발, 전국이 또 비상에 돌입하고, 긴장의 연속이다.
까뮈의 페스트를 읽는 밤이고 신종 바이러스 코르나-19 가 잠잠해지기를 기도하는 밤 빗소리가 들린다.
절정을 이루었다 떨어지는 흰 꽃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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