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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은 시인 / 사이프러스의 긴 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9.

김명은 시인 / 사이프러스의 긴 팔

 

 

시로코는 늪지대를 지나가

30호 캔버스 속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 두 그루

무너지지 않게 서로 몸을 기대고

거대한 밀밭에는 수염이 노란 허수아비 하나

귀와 입술과 둥근 밀짚모자 위로 붉은빛 윤곽이 드러나

 

바람개비별과 흰 구름의 융기가 솟은 첨탑을 피하고

둥근 달은 오른쪽으로 별들은 왼쪽으로 뭉쳐 떠다녀

단풍나무와 솔방울에 붙어 있던 날개 달린 씨앗들이 어디론가 날아가

태양은 그늘이 없는 곳을 투사하고 빛의 날개가 떠올라

죽음까지 태워 버리는 불꽃이 타오르고

던져 버린 꽃들을 일어서게 해

 

시엔, 당신은 창백한 정물화

덧칠한 흔적을 지우고 낮은 담장이 보이는 보랏빛 창문을 열어 줄게

생각해 봐 쏟아진 별들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을 내다볼 수 있게

광장같이 큰 창을 그려 줄까?

긴 머리칼을 빙빙 감아올리면 꼼짝없이 현기증이 날 거야 시엔,

 

색색 고운 빛 사이에서 구불거리는 언덕

바닥을 짚고 땅 위로 치솟은 민들레

생 레미라는 별에는 한번 자르면 다시는 싹 틔우지 않는 나무가 있대

그게 사이프러스야 그 별의 갈대들은 하늘을 보며 소리를 지르지

불길을 향해 까마귀 떼가 날아와 부딪치기도 해

 

벌어진 상처 같은 건 없어 구석까지 귀퉁이까지 뻗어 가는 독

파닥거린 당신을 향해 뻗은 긴 팔

버려진 당신을 프리즘처럼 채색할 거야 당신의 경악이 지워지지 않도록

진한 암녹색 배경이 거친 캔버스 뒤쪽으로 넘어지지 않게

초승달과 나무들 사이에 불꽃이 살아 있어

 

계간 『시와 경계』 2009년 겨울호 발표

 

 


 

 

김명은 시인 / 고층아파트의 붉은 그늘

 

 

열린 창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기다렸던 자리

꽃 핀 나뭇가지 잘렸다 잘린 가지 위에 몸을 던질까말까

 

빗방울은 떨어지기 전에 둥글게 몸을 말고

떨어질 자리를 내려다보고

 

낮달맞이 피고 허공에서 허공으로

한순간 쏟아진 그늘 밑으로 부음이 걸어간다

 

나를 사랑하긴 해? 아내는 질문을 던지고 몸을 던졌다

나만 없어지면 되겠네 사춘기 아이는 문을 쾅 닫지 않았다

12층 의자를 밟고 흰 빨래 같은 아이가 날아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체온이 무거울 때

사방 틈을 채우고 있는 선형구도

그럼 진행해볼까요

죽긴 왜 죽어 누군가 천 가지 이유를 쓰는 동안

 

난관에 먼저 부딪쳐 난간을 뛰어넘고

은빛체인 목걸이와 젖은 머리카락이 피와 뒤엉킨 그늘

몇날 몇 시간 후 허공에서 찍히는 발소리

 

벽은 높고 높은 벽 창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을 가르는 날개도 어떤 높이에서 가라앉았다

 

 


 

김명은 시인

1963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200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이프러스의 긴 팔』(천년의시작, 2014)이 있음. 현재 〈빈터〉 동인으로 활동 中. 현재 계간 『시와 표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