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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은정 시인 / 불황의 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9.

박은정 시인 / 불황의 춤

 

 

태양아 나의 얼굴을 앞질러 가는 짐승아

나는 너와 반대편으로 눈을 감고 어둠의 춤을 추리라

 

어깨를 치고 달아나는 안개

세계는 정신의 불황으로 흩어진다

 

노멘은 자신의 신음을 낱낱이 복기하며

낡은 피아노를 친다 절룩거리며 이어 온 음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제껏 자신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니

 

유년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거울

아무리 딲아도 웃고 있는 얼굴은

몇 겹의 울음보다 슬프다

 

간밤의 꿈이 크게 입을 벌리고

어린 노멘을 희롱하며 폭소를 터트리면

어머니는 노멘의 얼굴을 가만히 덮어 주었다

 

꿈마다 불황이 찾아오면 너는 살아 있는 인간

춤을 추어라 수천개의 얼굴로

 

손톱을 물어 뜯으며 잠든

노멘의 얼굴이 아침까지 말게 웃고 있다

 

오른뺨을 맞으면

시린 왼뺨을 내어주듯이

 

우리를 끝으로 이끄는 자들의

아름다운 이빨 앞에 엎드려

 

자신의 팔을 깨물며

슬픔을 참는 어린 노멘이 여기 있다

 

오 늘처럼 이상한 밤이면 모르는 이웃들을 초대하여

세계의 지리멸멸한 친절을 애도하리니

 

나의 생은 끝나지 않는 실폐처럼

공중으로 떠오르다 무너져 내리는

불황 또 불황의 춤

 

이곳은 반목의 세계

나는 야윈 목젖을 흔드는 배우처럼

딱 하루만 울겠습니다

 

그의 웃고 있는 얼굴이 떨어지고

노멘은 없는 사람

 

이제 이웃들은 실어증에 걸린

고독한 늙은이처럼 말이 없다

 

이것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어느 광대의 잃어버린 전설

 

어린 노멘이 불을 끄고

없는 얼굴을 하나둘 배웅한다

 

 


 

 

박은정 시인 / 우리는 죽기 직전에야 함께 있음을 알았다

 

 

소란스런 꿈에서 달아난 밤에는

태풍에 떨어진 낙과처럼 자신의 모습을

개 짖는 소리에 묻어버리고 싶었네

 

뜬눈의 소음들이 난무하는

목소리, 그 지겨운 목소리들

 

부엌에는 추리소설을 읽는 선한 눈동자가

안방에는 스모 경기를 보는 중년의 입술이 있어

헐벗은 마음을 가두고도 사료 주지 않는

소녀의 뒤꿈치가 절름거리고

 

이 축축한 세계에선 누구도 멀리 가지 못하네

 

목책 아래 가시풀이 바람을 휘감고

침묵 속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지평선 되어

마른눈으로 대기를 감싸는 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필연조차

우연으로 가장하고 우연의 무력함으로

나는 사람처럼 살아가려 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애매한 용서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늙고 병약한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건반을 누르던 밤

 

패배보다 멋진 절망 속에서

손 하나를 내밀면 마음 하나가 꺾이는

한숨이 있고 그 한숨 속에서

몸을 축이는 노인의 알약 같은 안온함

 

죽은 노인을 둘러앉은 유령들이

코를 막고 다음은 누구 차례일지 가늠해보는

그런 짜고 막막한 여름이 있었던가

 

곤두선 머리카락이 빗줄기에 젖어

어제의 미움도 함께 녹아내리던 날들

 

백 번을 헤어지자고 다짐했지만

다음 날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여자와

테라야마 슈지의 책을 책장에 꽂을 때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어쩔 줄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잠든 천사의 깃털을 주우려고

시린 손가락에 입김을 불던 믿음과

간밤의 이불 속에서 덩굴처럼 자라나는

의구심이 두 눈을 가릴 때까지

 

이 고독한 전쟁 속에서

밤은 누구의 편도 아닌 조악한 신을 향해

 

엎드려 눈 감고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도시를 건너 도시의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라면

 

우리의 죄를 묻지 않는 물고기들

어제의 슬픔을 나무라지 않는

나무들/ 바람들

절벽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본 것은 무엇인가

 

물음표를 던지면

도미노처럼 눈을 감는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에서 출생. 창원대학교 음악과 졸업.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 2015)와 『밤과 꿈의 뉘앙스』(민음사, 202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