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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옥성 시인 / 그의 공방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9.

김옥성 시인 / 그의 공방에서

 

 

죽은 자들의 살결을 어루 만진다

시체의 향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죽은 나무들의 시체들,

오래될수록 혈액이 살아나는 목재를

쓰다듬으며

나는 환생을 꿈꾸지 않는다

이 나무들이 썩지 않는 것은,

아니 더욱 생생하게 연륜을 드러내는 것은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가을날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을 보라

나무들은 이미 헛된 것들을 전부

허공에 풀어주었다

살갗을 깊이 파고들었던 상처도

첫사랑의 기억도

거칠었던 수피는 이미 다 깎여나갔다

남은 것이라곤 하얀 뼈

이 뼈는 내것이 아닌 너를 위한 선물

서랍이 되어 네 추억을 간직하거나

소박한 장이 되어 네 생애를 전시해줄 것이다

그의 공방에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서랍과 장은 언젠가 버려지고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 이 향기는 불멸이다

환생의 꿈마저 놓아버린 나무의,

흰 뼈의,

향기가 진동한다

 

 


 

 

김옥성 시인 / 도살된 황소*를 위한 시간

 

 

피처럼 노을이 퍼진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쌀 씻는 소리

밥 짓는 향기

화인火印처럼 이마가 불탄다

누군가의 육체로 연명하는

이 도시는 절대로 유령들에게 점령당하지 않는다

 

방금 전생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피 묻은 육체가

악몽이 열리는 나무처럼 펼쳐져 있다

저 죽은 육체는 왜

이승에 정박한 닻처럼 무거운 것일까

 

심장을 파헤쳐보니 너의 슬픔은 한 송이

영산홍이었다

마지막 울음을 뱉어낸 너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후생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꽉 들어찼다

어쩌면 나는 그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내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수천수만 번의 생 동안 수천수만 번 자신을 살해한 자들을

도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아무도 알아선 안 되지

 

순항하는 목숨들은 없는 것일까

그러게 순항하는 슬픔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여기는 좌초한 목숨들이 흘러들어오는 곳

그는 빛바랜 일지에 오늘

도살된 육체의 이름을 기록한다

목숨이 갈라질 때마다 저절로 새어나오는 비명의 기록은 생략한다

 

삼생을 몇 바퀴 돌고 온 듯 파리가 허공을 휘젓는다

썩은 살점을 찾는 것일까

남아 있는 온기를 찾는 것일까

아니면 피의 기억을 더듬는 것일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괴롭혀 왔기 때문에

그는 평생 외롭고 슬펐다

 

한때는 초식 동물의 피에서 초원의

풀냄새를 맡기도 했다  

싱싱한 생피를 마시고 옷소매로 피 묻은 입술을 닦고

초식 동물처럼 초원을 내달리고 싶었다

풀처럼 거센 바람 속에서 아무렇게나 춤을 추고 싶었다

피 속에 적멸보궁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잠들 수 있을까

잠에서 깨어나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을까

눈을 뜨면

피의 울음이 고인 하늘에 태어나 있지 않을까

월요일엔 산사에 들러 천수경을 외우리라

 

그는 너의

뛰는 심장을 기억한다

심장 속에서 끊임없이 붉은 영산홍이 피고지고 또 피었다

피에서 피로, 피에서 꽃으로, 꽃에서 꽃으로 펼쳐지는 피의 연대기에 대해 생각한다

석양으로 떠나간 사람들은 붉은 꽃으로 태어났다

짐승들도 사람들도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왜 너의 붉은 육신을

먹어야 하는가

나는 언젠가  

너를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공기가 바뀐다

하늘에서 불타고 있는 구름 조각들을 올려다보며

피 묻은 시체들에 대하여

부유하는 것에 대하여

흩어지는 것에 대하여

탄생하는 것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려다 그만 둔다

 

곧 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우우 진군해오는

어둠의 자식들

울부짖는 짐승들의 형형한 눈동자와 나는

 

* 렘브란트의 그림, 1643년경.

 

 


 

김옥성(金屋成) 시인

1973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2003년 《문학과 경계》에 소설과 2007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시로 등단. 학술서로 『현대시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미학』, 『한국 현대시의 전통과 불교적 시학』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中. 천마문화상(1995), 대학문학상 시부문(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