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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말씀묵상] 식어버린 열정, 주님 사랑의 불꽃으로 다시 뜨겁게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4.

[말씀묵상] 연중 제20주일 - 식어버린 열정,

주님 사랑의 불꽃으로 다시 뜨겁게

제1독서 예레 38,4-6.8-10 / 제2독서 히브 12,1-4

복음 루카 12,49-53

가톨릭신문 2022-08-14 [제3306호, 19면]

 

 

변화하려는 노력 상실한 인류에게

뜨거운 사랑의 불 지피시는 예수님

나태함 떨치고 의미 있게 살아가길

 

 

 

한스 멤링 ‘최후의 심판’ (1467~1471년, 일부).

 

 

사랑이 식어가는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해외에 잠시 머물 때, 따뜻한 남유럽의 한 수도원으로 공동체 피정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피정 집은 달력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호숫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호숫가로는 올리브나무 사이로 호젓한 산책로가 길게 나 있었습니다. 천국이 따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밤이 오면 또 하나의 색다른 체험을 하곤 했습니다. 언덕 위에는 작은 경당이 세워져 있었는데, 하루 한 번 강의는 그 경당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경당의 특징은 인위적인 불이 일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촛불과 등불만이 그 경당의 조명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천장으로부터 길게 드리워진 우아한 등잔 위에는 항상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 제의방지기 수사님은 벽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있는 촛대에 일일이 불을 밝혔습니다. 강의를 하시는 신부님의 손에도, 강의를 듣는 우리 각자의 손에도 작은 촛불이 하나씩 들려졌습니다.

 

촛불의 자연스러운 빛은 경당을 정녕 아름답고 따뜻한 공간으로 창출해냈습니다. 촛불을 들고 있던 우리 각자의 얼굴도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꽤 험상궂게 생긴 수사님 얼굴도 그 경당 안에서는 예뻐 보였습니다.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신부님 얼굴도 그 경당 안에서는 더 이상 미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공기의 순환에 따라 춤추는 불꽃, 그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은 늘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불이 이렇게 예쁠 때도 있구나, 불의 움직임이 이렇듯 아름다울 때도 있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꽤 섬뜩한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방화범이 되러 오셨다는 말인데, 우리의 예수님은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다수의 고통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 무자비한 방화범, 자신 안에 쌓여있는 상처와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을 지르는 그런 방화범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방화범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점점 소멸되어가는 이 시대 뜨거운 사랑의 불을 놓으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꺼져버린 지 오래인 영혼의 불에 다시금 활활 불을 지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대화가 단절된 곳에 소통의 불을, 슬픔으로 가득 찬 곳에 위로의 불을, 무관심과 나태함으로 가득 찬 곳에 열정과 몰입의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 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르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즈카 13,8-9)

 

우리 역시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쫓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 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 분 일 초라도 의미 있게 보내야겠습니다.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는 1994년 사제품을 받고 영성신학 전공으로 로마 살레시오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서울 대림동 수도원 원장, 수련장 및 대전 정림동 수도원 원장, 서울 관구관 원장, 부관구장, 관구장 등을 역임해 왔다. 현재 태안 내리공동체 원장 겸 살레시오 피정센터 담당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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