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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28.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

주님은 겸손한 마음에 성령과 능력을 채워 주십니다

제1독서 집회 3,17-18.20.28-29

제2독서 히브 12,18-19.22-24ㄱ

복음 루카 14,1.7-14

가톨릭신문 2022-08-28 [제3308호, 19면]

 

 

교만함 버리라고 강조하신 하느님

겸손하게 주님 믿고 살아간다면

앞자리 초대되는 영광 누릴 수 있어

 

 

 

루카 시뇨렐리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 (1488~1490년)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창세기 11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외국에 있을 때 그 말씀을 읽으면서 ‘지금도 말이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외국어를 공부한다고 하지만 외국말이 늘지 않아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외국 성당 아이들이 또박또박 자기네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럼 왜 갈라지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바벨탑 이야기를 읽어 보면 사람의 교만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이 같았으면 몰랐을 텐데, 말이 다르고 배워야 하니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셨던 분들이 대부분 느끼셨던 거라고 하는데요. 바로 겸손함입니다.

 

외국 생활의 대부분은 배우는 거였습니다. 학생의 자리에서 수업을 듣고 질문에 대답을 합니다. 때로는 선생님이 자기 손으로 이마를 치며 또 못 알아들었고 답답해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학생 때 하던 버릇대로 웃으며 머리를 긁죠. 그냥 학생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어딜 가나 도움이 필요하고 배움이 필요한 그런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예전의 모습이 그리워서 본당 행사 사진들을 볼 때가 있었는데요. 그 때의 모습은 대부분 가르치고 일을 주관하던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때도 있었다고 추억에 잠길 때가 있었는데요. 만약에 제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많이 부딪혔을 겁니다. 교만함이 고개를 들면, 아마도 그 자리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 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말이 다르다는 것은 ‘교만함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살아가라’는 초대인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니, 주님께서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자리를 만들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겸손해지고 비워진 마음에 주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채워 주시고 또 새로운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루카 14,10)

 

렉시오라는 보드게임이 있습니다. 3~4명이 하는 게임인데요. 방식이 간단합니다. 9개에서 15개의 패를 받고, 먼저 다 내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려놓는 것은 아니고요. 먼저 내려놓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선에 의해서 자기 차례에 내려놓을 수 있는 개수가 제한됩니다. 예를 들어 선이 1개를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도 그보다 큰 수를 한 개만 내려놓을 수 있고, 선이 5개 조합을 만들어서 내려놓으면 다음 사람도 그보다 큰 5개의 조합을 만들어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계속 선을 잡는 것인데요. 선을 계속 잡기 위해 내 패를 잘 읽어야 합니다. 한 개씩 내려놓아야 계속 선을 잡을 수 있는지, 아니면 두 개 이상 큰 수를 내려놓는 것이 유리한지 잘 계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는 많이 내려놓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선의 기회가 주어지면 무턱대고 다섯 개 조합만을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쉽고 빠르죠.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승리의 디딤돌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패가 나보다 많아서 나의 승리가 당연해 보이지만, 내가 다섯 개 패를 내려놓는 순간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다섯 개의 조합을 연속으로 내려놓고, 선을 잡아 자신의 페이스대로 게임을 마무리하곤 합니다.

 

‘나’는 다섯 개를 내려놓고 승리에 다가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이 기다리고 있었던 계획에 도움만 주고, 패하게 되는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일을 악한 영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기려고 일을 벌여 보지만, 결국엔 그 일이 상대방의 승리를 도와줍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일이 그렇습니다. 악한 영은 형제들의 마음속에 시기심과 미움의 감정을 만들어 요셉을 없애버리고자 하지만, 그 일이 오히려 더 큰 하느님의 계획과 승리를 드러내게 합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그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고,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모세도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젊은 왕자인 모세는 동포들을 구해 내기는커녕, 그들 때문에 이집트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아마도 악한 영은 잘 됐다고 좋아했겠지만, 하느님은 그 일로 모세에게 광야 생활과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시어, 그들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광야로 달아난 모세를 데리고 더 큰 일을 이루신 겁니다.

 

바오로도 감옥에 갇힐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악한 영은 바오로를 감옥에 가두면 조용해 질 줄 알았을 겁니다. 실제로 그의 입은 조용해졌죠. 하지만 그는 펜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편지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전해지고,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한 진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악한 영은 자기가 승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선교를 이루는 데에 발판이 됩니다.

 

하느님은 걸려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 주실 수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더 앞자리에 앉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겸손함으로 주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앞자리로 초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