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주 시인 / 교차로
꽃들은 계절보다 먼저 피었고 당신은 만날 때마다 처음처럼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익숙해지는 순간 사람도 시도 멀어진다는 걸, 계절은 끝없이 여름이었다 빗방울이 발목을 잡고 반복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거라 했다
해가 지지 않는 캔톤플라자 코너스델리에서 너를 보았다 소주가 달았다 떠나 온 거리를 알 수 없어 푸른 등에 귀를 붙이고 시차를 계산했다
투명한 불꽃으로 손을 녹이고 싶었던 나는 불온한 연애마저 희망이라 속삭였다
낯선 시간 신호등이 켜졌다
이언주 시인 / 책 읽는 과수원
사과 꽃 지는가 싶더니
열리기 시작하는 작은 알맹이 이파리 뒤에 숨어 파란 몸 불립니다
고물상에서 달아 온 책으로 이제 막 옹알이 끝낸 사과들에게 문장 하나씩 씌워줍니다
볕이 너무 강하면 빨리 익고 설익으면 과육이 싱겁지요
저자 사인한 쪽으로 마지막 사과를 쌉니다
행간으로 스며든 이슬 얼룩진 여름에 밑줄 그을 때 봉투 속에서 둥그런 詩가 여물어 갑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책 한권씩 펼쳐 읽고 뒷맛이 깊어진다는데
벌써, 단물이 오르는지 알전구 빨갛게 익어갑니다
-시집 『그림자 극장』2015.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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