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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은여 시인 / 머그컵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20.

최은여 시인 / 머그컵

 

 

앵두를 줍는다

 

나와 앵두는 소나기를 맞았다

앵두는 떨어지고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앵두는 깨끗해졌다

우리의 이마는 닮았다

빗줄기 하나가 앵두를 겨냥해 때릴 때

저항 없이 공중에서 조금 머물다 내려앉는다

푸른 잎을 끌어안고 내려앉는다

 

낙하의 끝은 안전하다

공처럼 튀어 오르지 않고 공처럼 구른다

시멘트 바닥은 나쁘지 않다

외상을 입지 않았다

 

앵두를 따라가던 내 무릎이 깨졌다

빨간 빗물이 짓물러 고였고

앵두처럼 통통해졌다

 

가득 찬 것은 주물러 터트리고 싶어진다

차오른 빗물을 세차게 밟는다

고였던 앵두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바닥이 앵두를 줍는다고 정신없이 내달린다

 

 


 

 

최은여 시인 /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지겨워, 중학생들이 표정을 만든다

네까짓 것들이 뭘 알고 떠드니?

오늘 도서관은 이런 분위기이다

 

책은 번호 순서대로 잘 꽂혀있다

ㅅ 다음 ㅇ

아버지 다음 할아버지

 

검색대의 첫 번째 책이 입을 연다

검색대의 마지막 책이 눈을 끔벅인다

나는 너보다 먼저 태어났고 너는 나보다 뒷번호를 가졌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거짓말이 많고 왜곡이 많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방에는 장난이 많고 낙서가 많다

사서는 턱이 빠지도록 하품을 하고 있다

 

기침 소리와 끼이익 의자 소리

열람실의 환풍기

 

친구들은 벌써 도망갔다 도서관으로부터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르며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종이책에서 묵은 살냄새가 난다

나는 내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최은여 시인 / 미러링

 

 

누가 방문 입구에 커다란 거울을 걸어놓고 갔다

 

나는 이제 거울 안에서 웃는 사람

나는 거울이 만든, 털이 북실한 꼬리를 가진 사람 종류

나는 하루 내내 표정을 짓는 거울

나는 의도치 않는 흐름

 

자꾸 내려가는 입꼬리를 바지춤 올리듯 추켜 세우고 세운다

조커의 입꼬리는 의도를 다 읽혀 버렸고

웃음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놓치고 말았다

자살이 너무 슬퍼서

나는 조커의 웃음을 샀다 혀를 날름날름 입술에 침을 잔뜩 묻히고

 

너는 잘 웃는다 거울이 혐의를 씌운다

증거는 잡혔다 거울 속

내 이마에 먼지가 묻었다

내 가슴팍에 손자국이 찍혔다

 

무거운 거울을 등에 업고 허리가 휘도록 온 시내를 쏘다닌다

표정 하나쯤 달고 다녀야 사람들이 겨우 봐 준다

등에서 미끄러지면 산산조각 날 얼굴

같이 주워 줄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굴러가는 파편을 끝까지 따라 가지 못하고

잘 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

너는 잘 웃는 사람, 거울 속에 갇혀 산다

 

 


 

 

최은여 시인 / 예민한 장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건드리기 전까지

 

작고 얄미운 새 떼가

덤불 속에 들어앉아 있어

나는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시늉만 한 사람

 

작고 얄미운 새 떼가

 

한 번 옮기고 믿지 못해 또 한 번 옮기고

 

새와 내가 장난을 해

덤불을 향해 나무 작대기를 던지는 시늉만으로

 

새들이 달아나 준다

달아나면서 끝없이 재잘댄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기호를 사용한다

 

새가 새로 움직인다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나보다 가볍다는 것을

나는 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계속 나인 채 보고 있다

같은 자리 같은 무게 같은

 

새는 계속 새로 있다

 

 


 

 

최은여 시인 / 내 이름은 Run

 

 

단면은 쉽고 양면은

어려워

 

자를 수 있는 것만 양면을 가졌어요 단면은

양면의 절반이 아니에요

나의 단면은 겉과 속이 같아요

 

단면은 실체,

단면은 전부,

나의 얼굴은 단면이에요

 

배달에 지친 나는 계단 모서리에 앉아

건물과 건물 사이 어스름 해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요

햄버거집 탁자 위 단면은 단면 쪽으로 단면 쪽으로 기울어

한 입 베어 먹을 때마다 이게 저녁밥이야 하는

입 모양으로 오물거려요

 

다시 밤이 와도 나는 언제나 한쪽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전속력으로

 

단면으로 이어진 길을 달려보아요

나는 단면 끝까지 가 보기로 했어요

조각조각 이어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조각조각

 

단면으로 울어요

단면으로 걱정하고 단면으로 포장을 하고

단면으로 노래하고 단면으로 프린트해요 단면과 단면이 만나

이제 양면이 되기 싫은 나는 처음부터 단면이었어요

 

 


 

최은여 시인

1970년 경남 진주 출생. 경상국립대학교 역사교육과 졸업. 제17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