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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신 김대건·최양업 전] (64)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하)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5.

[신 김대건·최양업 전] (64)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하)

해발 900미터 산골 교우촌에서 110리(약 43km) 걸어온

신자들에게 성사

가톨릭평화신문 2022.10.02 발행 [1680호]

 

 

 

▲ 최양업 신부는 멍에목 교우촌 신자들이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요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 인근에 사는 지체 높은 양반 조씨를 입교시켰다고 한다. 사진은 속리산 지맥인 구병산 능선 북쪽 골짜기에 자리한 멍에목 성지.

 

 

멍에목

 

멍에목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개된 최 신부의 사목지이다. 최 신부는 이 편지에서 양반 조씨가 멍에목 신자들에게 감명을 받아 세례를 받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최양업 신부가 신원을 밝힌 영세자는 조씨가 유일하다.

 

“그는 천주교를 한낱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만 알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에서 멀지 않은 멍에목이라는 한 산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우연히 멍에목 신자 마을이 화재로 몽땅 타버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조씨는 즉시 그 마을에 가서 화재를 당한 신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씨가 보기에 신자들은 조금도 근심하거나 마음에 동요하는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서도 신자들이 평온한 낯으로 태연하게 있는 것을 본 조씨는 매우 이상히 여기며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왜 그러한지 이유가 몹시 궁금해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신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실토하고 말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조씨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여 곧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고,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배우며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외교인들이 보기에 우연히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믿게끔 꾸미고 집과 우상(위패)들을 불 질러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사회생활을 떠나 친척들과 친구들과의 교제를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제가 그 교우촌에 가서 조씨에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개종하여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 되셨습니다.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 중에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하고 책임지웠습니다.”

 

멍에목은 오늘날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길 6 에 자리한다. 속리산 지맥인 구병산 능선 북쪽 골짜기에 있어 충청도와 경상도 상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길목에 있었다. 멍에목 교우촌의 역사는 깊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박경화(바오로)ㆍ박사의(안드레아) 부자와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복자 김종륜(루카), 같은 해 청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최용운(암브로시오) 등 많은 순교자가 이곳 출신이다.

 

진밭들

 

진밭들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6년 9월 13일 소리웃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최 신부는 이 편지에서 성사를 집전하다 갑자기 100명이 넘는 포졸들이 들이닥쳐 체포될뻔한 사연을 들려준다.

 

“하루는 전라도의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100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 떼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제가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 집을 둘러싸더니 미사 가방과 성작 등을 빼앗아 가기 위해 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오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함께 있던 신자들이 비록 숫자는 그들보다 적었으나 그들의 침입에 완강히 대항해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문을 빙 둘러싼 그들은 온갖 폭력을 행사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고, 신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물리치느라고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쌍방 간에 부상자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방 안에 있었는데 신자들의 도움으로 급히 미사 짐을 챙겨 치우고, 뒤 창문으로 재빨리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해 산속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위와 가시덤불 사이로 허둥지둥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서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북새통에 양편에 부상자가 많이 났고, 결국 외교인들이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도 아무것도 강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마을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장은 그 마을의 유력한 사람 5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저에게 여유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저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하지 못하니 한숨 밖에 보낼 것이 없습니다.”

 

진밭들은 오늘날 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진밭들길 101-13에 자리한 교우촌이다. 마을 입구부터 안쪽까지 긴 밭이 있다고 해서 ‘진밭들’이라 불렸다. 이곳은 1791년에 순교한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가 살던 진산에서 가까운 곳이다.

 

만산

 

만산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4일 불무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한다. 최 신부는 해발 900m 고지에 자리한 이곳을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라고 소개한다.

 

“그 마을에는 극도로 가난한 신자들 다섯 가정이 사는데 그들은 먼저 살던 고장에서 천주교를 실천할 수가 없었으므로 얼마 전부터 그곳에 이사해 정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작은 촌락은 험준한 산속에 있는데 이름을 만산이라고 합니다만 가히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라고 말해야 적절할 만큼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제가 찾아가서 성사를 집전해 주어야 할 곳이 그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110리(약 43㎞) 떨어진 곳에 가련한 몇 가족이 사는 작은 교우촌이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금방 이사를 와서 아직 거처할 만한 움막 하나도 짓지 못하였고, 따라서 공소집을 마련할 시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자 가족들은 모두가 성사를 받기 위해 만산으로 와야 했습니다.… 그중에 남자가 2명이고, 16세 처녀가 1명이며, 13세와 11세 소녀가 2명, 끝으로 9살 된 남자 어린이 1명이었습니다. 이 연약한 무리가 단지 하루 사이에 110리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꼭두새벽에 집을 떠나 반 이상 되는 곳에 있는 어떤 촌락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장정 20여 명이 지팡이와 몽둥이를 갖고 나타나 어린 처녀와 소녀들을 겁탈하려 덤벼들었습니다. 저들은 처녀들을 빼앗으려 하고, 이편에서는 대항하려 옥신각신하는데 홀연히 그 마을에서 점잖은 노인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 노인이 이 고삐 풀린 망나니들의 파렴치한 행패를 준엄하게 꾸짖고 우리의 불행한 포로들을 해방해 주었습니다. 이 용감한 신자들은 비록 피로와 허기와 생각하지도 않던 공격의 충격으로 아주 지쳤지만, 불량배들로부터 구출된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면서 다시 걷기 시작해 저녁나절에야 아주 의기양양하게 공소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신자들과 제가 얼마만 한 기쁨과 연민의 정으로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얼마나 서둘러서 다 함께 하느님께 가장 깊은 감사를 드렸겠는지 신부님께서 상상해 보십시오.”

 

만산 교우촌 터는 오늘날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구운리 993에 자리한다. 이곳은 아홉 신선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던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구운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백적산(884m)과 비래산(915m) 사이 깊은 산중에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한북정맥의 남쪽 출발점인 대성산이 바로 보인다. 만산 정상은 해발 976m이다. 이 꼭대기에 교우촌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일반 차량으로 갈 수 없는 험한 곳이다. 이 척박한 곳에 오직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신자들은 삶의 자리를 개간했고, 최양업 신부는 그들에게 성사를 베풀기 위해 기꺼이 이곳을 찾았다. 어린 시절 자기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강원도 김화 산골로 이사와 화전을 가꾸며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