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자 시인 / 공검(空劍)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공검(空劍) :허(虛)를 찌르는 칼(필자의 신조어)
정숙자 시인 / 정오의 눈
우리는 거기, 그 안에서 덤벙거린다 그 시력은 퇴화되지 않는다 밤에조차 감지 않지만 어떤 한마디도 흩지 않는다
다 알면서 다 봤으면서도 누가 무엇에 걸렸을지라도 비할 바 없이 따뜻하고 맑고 조용한 그 눈이야말로(그러나) 가장 무서운 눈일 수 있다
총괄적으로 담담한 그 눈이야말로 그만의 비공개적 합목적적 눈일 수 있지 않은가
하. 그러면 어때. 내 눈이 그 눈을 속이지 않는다면 그 눈도 내 눈을 속이지 않는다. 걱정 없다. 그저 걸으면 된다. 그 눈은 사심 없는 눈. 인간으로선 도저히 ‘모방’에도 접근할 수 없는 눈. 개벽 이후 하루에 단 한 번만 껌뻑이는 눈.
그 큰 눈을 믿고 골짜기 물은 절벽에서도 힘차게 뛰어내리지. 호수는 돌에 맞아도 굴렁쇠를 굴리며~굴리며~굴리며~웃지. 더 많이 아픈 가슴이 더 많이 사는 거라고 믿지. 태산이 무너져도 그 눈에 기대어 새파란 무릎을 찾지.
우연히 발견한 책상 밑 아기 거미 마른 주검을 차마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
고만고만한 그런 눈들도 그 큰 눈은 다 보고 있지 다 알고 있지.다 다 다…기억도 하지. (그러니)
하. 그때 좀 그런 게 어때 흑. 지금 좀 이런 게 어때
정숙자 시인 / 거기(정면으로)서 있는 자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 썰이 횡행한다 하지만 도플갱어를 어디서 만날 수 있나
때론 그를 보고 싶었고 딴은 맞닥뜨릴까 봐 무섭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그를 만났는데도 내가(혹은)서로 못 알아보고 넘어간 건 아닐까,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건-어느 신비주의자가 내건 그림이 아닐까 그런-허구가 온전한 줄기로서 이토록 세상에 너울거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가 어디 사는지…어느 때 마주치게 되는지…그와 정식으로 마주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까지도…그것이 진실이라는 심증도 어렴풋 만져진다. 출구 없는 자신을 만났을 때, 거기(정면으로)서 있는 자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눈 한순간 맞부딪쳐 버리는 자기 자신의 극한의 눈
의, 벼락
에 타버리는 것, 죽는 것이다
∴첨예한 고통과 고독을 응시할 때는 반드시 한쪽 팔 잡아줄 햇빛 나누어 줄 디오게네스에게 미리-필히-연락해둘 것 (추신: 그러므로 아픔들이여! 그렇게까지는 자기 자신을 몰고 가지 말 것)
정숙자 시인 / 죽음의 확장
하나의 죽음은 또 하나의 죽음을 안내한다
조금씩 조금씩 낯설지 않게 친숙의 문까지를 열어 보인다
고요한…고독 그것에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온종일 전화벨 한 옥타브 튀지 않아도 새소리만 멀리 걸려도,
중심에 죽음이 있다
일주일은 왜 열흘이 아니고 칠일인가? 그런 촉박(促迫)도 어지간히 둥글어졌다
삶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먼저 ‘ㅁ’이 그리고 ‘ㄹ’이 그리고 ‘사’만 남는다. 거기서 또 한 획 멀어진다면 ‘시’만이 남게 되겠지. 최후까지 남는 게 시였다니! 그리고 조금 더 훗날‘ㅅ’만 남게 된대도 내게는 태양이야. 시옷, 시옷이니까.
홀로 떠 있다 보면 어떤 돌이나 행성이라도 바람과 안개에 의해 그 긁힘과 마모에 의해 최종의 뼈마저도 해체/봉인되겠지 그리고 다시, 거기서 다시 잎이 나겠지 어둡지 않고 차갑지 않은 삶보다는 수 광년 진화된 하늘 먼저 간 죽음이 타전해 오는 새로운 의미의 확장, 일체의 혼란 바꾸는 죽음
정숙자 시인 / 랑그의 강
이제 나는 그가 된다. 그가 열다 만 골목, 그가 띄우다 만 달빛, 그가 젓다 만 물살…먼 데까지…식물들이 습득한 일념을 빌려 쓰고자 한다. 알 수 없지만 장차 내가 되고자 하는 그가 어떤 초상일지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머나먼 강둑에서 만나게 될, 그를 침묵과 함께 출발시키려 한다
나란히 날아가는 두 마리의 잠자리. 이 둘은 멈추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름이 바람이 구름이 바람이 뒤로 밀릴 뿐. 이 둘은 서로 놓치지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를 현상을 놓아 보낸다
예사로운 하늘만이 예스러운
내가 아직 흙이었을 때
뿔뿔이 벋은 길들은 강들은 저절로 가지 쳤을까. 헤쳐모인 돌들은 꽃들은 저절로 둥글었을까. 낭떠러지와 별 따위도 저절로 그리 깊어졌을까. 그 모두 누군가 비우려던(덜 태운) 절규는 아니었을까.
떠난 자는 슬픔뿐! 슬플 뿐! 이제 나는 그가 된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잠자리를 두 마리라 해도 두 마리의 잠자리를 한 마리라 해도 틀리지 않다 나는 비로소 입체적이다 탑재된 눈물 밖 삼인칭과 일인칭 사이 너무나도 조용한 밑변 위에서
정숙자 시인 / 굴원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도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나는 아마도 먼-먼-어느 산 너머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 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목숨 아낄 리 없지
-시집 『공검 & 굴원』(미네르바,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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