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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숙자 시인 / 공검(空劍)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4.

정숙자 시인 / 공검(空劍)

 

 

눈, 그것은 총체, 그것은 부품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지운 것을 듣고, 느낌도 없는 것을 볼뿐더러

능선과 능선 그 너머의 너머로까지 넘어간다

 

눈, 그것은 태양과 비의 저장고

네거리를 구획하고 기획하며 잠들지 않는

 

그 눈, 을 빼앗는 자는 모든 걸 빼앗는 자다, 하지만

그 눈, 은 마지막까지 뺏을 수 없는, 눕힐 수 없는

칼이며 칼집이며 내일을 간직한 자의 새벽이다

 

양날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수천수만, 아니 그 이상의 팔이라 할까

 

(나부끼지 않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바람-그냥 보냅니다. 대충 압니다. 나누지 않은 말 괜찮습니다. 여태 잎으로 수용하고 뿌리로 살았거든요 대지의 삶은 적나라한 게임입니다. 간혹 구름이 움찔하는 건 어느 공검에게 허를 찔렸기 때문,…일까요?)

 

공검은 피를 묻히지 않는다

다만 구름 속 허구를 솎는

 

그를 일러 오늘 바람은 시인이라 한다

공검은 육체 같은 건 가격하지 않는다

 

*공검(空劍) :허(虛)를 찌르는 칼(필자의 신조어)

 

 


 

 

정숙자 시인 / 정오의 눈

 

 

우리는 거기, 그 안에서 덤벙거린다

그 시력은 퇴화되지 않는다

밤에조차 감지 않지만

어떤 한마디도 흩지 않는다

 

다 알면서 다 봤으면서도

누가 무엇에 걸렸을지라도

비할 바 없이 따뜻하고 맑고 조용한

그 눈이야말로(그러나)

가장 무서운 눈일 수 있다

 

총괄적으로 담담한 그 눈이야말로

그만의 비공개적

합목적적 눈일 수 있지 않은가

 

하. 그러면 어때. 내 눈이 그 눈을 속이지 않는다면 그 눈도 내 눈을 속이지 않는다. 걱정 없다. 그저 걸으면 된다. 그 눈은 사심 없는 눈. 인간으로선 도저히 ‘모방’에도 접근할 수 없는 눈. 개벽 이후 하루에 단 한 번만 껌뻑이는 눈.

 

그 큰 눈을 믿고 골짜기 물은 절벽에서도 힘차게 뛰어내리지. 호수는 돌에 맞아도 굴렁쇠를 굴리며~굴리며~굴리며~웃지. 더 많이 아픈 가슴이 더 많이 사는 거라고 믿지. 태산이 무너져도 그 눈에 기대어 새파란 무릎을 찾지.

 

우연히 발견한 책상 밑 아기 거미 마른 주검을

차마 쓰레기통에 넣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눈

 

고만고만한 그런 눈들도 그 큰 눈은 다 보고 있지

다 알고 있지.다 다 다…기억도 하지. (그러니)

 

하. 그때 좀 그런 게 어때

흑. 지금 좀 이런 게 어때

 

 


 

 

정숙자 시인 / 거기(정면으로)서 있는 자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

썰이 횡행한다

하지만 도플갱어를 어디서 만날 수 있나

 

때론 그를 보고 싶었고

딴은 맞닥뜨릴까 봐 무섭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그를 만났는데도 내가(혹은)서로 못 알아보고 넘어간 건 아닐까,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건-어느 신비주의자가 내건 그림이 아닐까

그런-허구가 온전한 줄기로서 이토록 세상에 너울거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가 어디 사는지…어느 때 마주치게 되는지…그와 정식으로 마주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까지도…그것이 진실이라는 심증도 어렴풋 만져진다. 출구 없는 자신을 만났을 때, 거기(정면으로)서 있는 자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눈

한순간 맞부딪쳐 버리는 자기 자신의 극한의 눈

 

의, 벼락

 

에 타버리는 것, 죽는 것이다

 

∴첨예한 고통과 고독을 응시할 때는

반드시 한쪽 팔 잡아줄

햇빛 나누어 줄

디오게네스에게 미리-필히-연락해둘 것

(추신: 그러므로 아픔들이여! 그렇게까지는 자기 자신을 몰고 가지 말 것)

 

 


 

 

정숙자 시인 / 죽음의 확장

 

 

하나의 죽음은 또 하나의 죽음을 안내한다

 

조금씩 조금씩 낯설지 않게

친숙의 문까지를 열어 보인다

 

고요한…고독

그것에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온종일 전화벨 한 옥타브 튀지 않아도

새소리만 멀리 걸려도,

 

중심에 죽음이 있다

 

일주일은 왜 열흘이 아니고 칠일인가?

그런 촉박(促迫)도 어지간히 둥글어졌다

 

삶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먼저 ‘ㅁ’이 그리고 ‘ㄹ’이 그리고 ‘사’만 남는다. 거기서 또 한 획 멀어진다면 ‘시’만이 남게 되겠지. 최후까지 남는 게 시였다니! 그리고 조금 더 훗날‘ㅅ’만 남게 된대도 내게는 태양이야. 시옷, 시옷이니까.

 

홀로 떠 있다 보면 어떤 돌이나 행성이라도

바람과 안개에 의해

그 긁힘과 마모에 의해

최종의 뼈마저도 해체/봉인되겠지

그리고 다시, 거기서 다시 잎이 나겠지

어둡지 않고 차갑지 않은

삶보다는 수 광년 진화된 하늘

먼저 간 죽음이 타전해 오는 새로운 의미의

확장, 일체의 혼란 바꾸는 죽음

 

 


 

 

정숙자 시인 / 랑그의 강

 

 

이제 나는 그가 된다. 그가 열다 만 골목, 그가 띄우다 만 달빛, 그가 젓다 만 물살…먼 데까지…식물들이 습득한 일념을 빌려 쓰고자 한다.

알 수 없지만

장차 내가 되고자 하는 그가

어떤 초상일지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머나먼 강둑에서 만나게 될, 그를

침묵과 함께 출발시키려 한다

 

나란히 날아가는 두 마리의 잠자리. 이 둘은 멈추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름이 바람이 구름이 바람이 뒤로 밀릴 뿐. 이 둘은 서로 놓치지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를 현상을 놓아 보낸다

 

예사로운 하늘만이 예스러운

 

내가 아직 흙이었을 때

 

뿔뿔이 벋은 길들은 강들은 저절로 가지 쳤을까. 헤쳐모인 돌들은 꽃들은 저절로 둥글었을까. 낭떠러지와 별 따위도 저절로 그리 깊어졌을까. 그 모두 누군가 비우려던(덜 태운) 절규는 아니었을까.

 

떠난 자는 슬픔뿐! 슬플 뿐!

이제 나는 그가 된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잠자리를 두 마리라 해도 두 마리의 잠자리를 한 마리라 해도 틀리지 않다

나는 비로소 입체적이다

탑재된 눈물 밖 삼인칭과 일인칭 사이

너무나도 조용한 밑변 위에서

 

 


 

 

정숙자 시인 / 굴원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도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나는 아마도 먼-먼-어느 산 너머에서 그의 딸이었거나 누이였을지 몰라.

그의 투강 전야에

그의 마지막 입을 옷깃에

‘중취독성(衆醉獨醒)’담담히 수놓던 기억

돌덩이도 묵묵히 입 맞춰 보냈던 기억

 

몇 겁을 다시 태어나고 돌아와도 그 피는 그 피!

 

이천 년이 이만 년을 포갠다 한들

그 뜻, 그 그늘이면 한목숨 아낄 리 없지

 

-시집 『공검 & 굴원』(미네르바, 2022) 수록

 

 


 

정숙자 시인

1952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 시집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뿌리 깊은 달』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과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가 있음. 동국문학상 · 질마재문학상 · 들소리문학상 등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