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원 시인 / 연착
달리던 길의 뼈 하나가 주저앉자 마디마디 이어진 길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반대편 노선은 저녁의 등을 밀고 직선으로 내달린다 완행이 된 급행, 불안을 어디에 방뇨할까 다급한 마음의 모서리에 찔린 취기가 고함을 지르며 정체된 시간의 무릎을 걷어찬다 앞차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지연된다는 안내방송 막막한 길이 일어서기를 기다리는 초조한 눈빛들 어둑한 바깥 풍경에 불이 켜지고 나는 기다림을 접는다 초조함을 담아두는 저장고가 이미 넘쳤다
수십 년 길을 탐색한 어머니는 길의 전문가,딛지 말라는 허방에 빠져 나는 한동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길의 각도와 마음의 각도가 어긋난 시간 역과 역 사이에서 시간을 방류한 길 누군가의 생이 찰나에 지워지고 길도 함께 사라졌다 철로변 개나리도 샛노랗게 질렸다 마음에서 멀리 있는 돌아갈 집은 귀가를 기다리고,
저녁의 몸통에 지네 발처럼 어둠이 매달린다
-『미래시학』 2022년 가을호
이해원 시인 / 살아있는 무늬
열차 안,뱀가죽 백을 든 여인이 옆에 앉는다 꿈틀거리는 무늬, 소름이 내 손등을 타고 오른다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길이, 자바섬의 비단뱀은 비단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밥이다
화려한 무늬가 천적을 부른다 훈장처럼 뱀 이빨 자국을 팔뚝에 새긴 땅꾼들은 잡뱀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위장술과 나무 타기에 능숙한 비단뱀,나무 위로 몸을 숨겨도 예민한 귀를 가진 그들 잠잘 때도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풀잎이 흔들리는 곳으로 달려가 맨손으로 대물을 덮친다 엎치락뒤치락 터질 듯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 숨이 가쁘고 서늘한 피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도 밥이 새지 않게 조심조심 비늘 하나라도 다치면 안 된다 결국,머리를 잡은 쪽이 승자다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던 마대가 놈을 한 번에 삼킨다 뭉친 비명을 풀기 위해 뱀의 아가리를 벌리고 고무호스가 물을 붓는다 물처럼 부드러워진 가죽,
악어나 돼지를 통째로 삼키던 밀림의 포식자도 마지막 식사는 물이다 뱀 한 마리가 여자를 휘감고 구불구불 터널 속으로 기어간다
<문파> 202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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