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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우림 시인 / 을왕리 궤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5.

이우림 시인 / 을왕리 궤변

 

바다가 불러서

을왕리가 불러서

달려갔어

철조망에 갇힌 바다가

딴지를 걸었어

섬과 섬, 깍지 낀 손이 불편한 것은

해당화의 외도 때문일 거야

바다가 철조망에 갇히자

해당화도 모래톱을 잃었고

해풍도 철조망에 찢기고

갈매기도 조각난 하늘에 멈칫하고

문저리도 제 꼬리를 물고 바다를 들어 올렸고

어물쩡 코가 꿴 숭어 한 마리

묵은지를 불러다놓고

동어를 낳았어

그녀는 묵은지에 돌돌 말린 동어를

한 쌈 했어

김칫국인지 동어가 쏟아내는 양수인지

주루룩 흘러내리는 물을

연신 들이마셨어

눈알이 붉어지도록

감긴 동어 눈이 딱 한 번 치켜뜨도록

방향을 틀어 목구멍을 찾아가는 꼬리지느러미의 마지막 놀림

그녀는 바다를 삼켰고

동어는 심해(心海)를 꼬리쳐 갔어

또 하나의 바다가 생겼어

또 하나의 을왕리가 생겼어

내가 나를 낳았어

 

 


 

 

이우림 시인 / 구덩이와 개사람

 

 

충혈된 눈이 마당에 선다

구상나무가 질린 초록으로 내려다본다

땜질한 항아리 귀퉁이에 파인 구덩이

흑룡이와 영심이가 힐끔힐끔

내 눈의 신호를 기다린다는 듯이

어슬렁어슬렁 맴돈다

뜨끔하다

속내를 읽어버린 저들의 실행 앞에

지리고 만다

 

찻길도 깊이 잠든 지난 밤

귀가를 기대하지 않은 그가 들어온다

술독이 되어버린 발로 힘껏 대문을 차고 들어오는 개사람

집 안 가득 평화롭던 어둠이 긴장한다

흑룡이와 영심이 허둥대는 소리가 너울처럼 현관을 연다

마당 가운데 앉아 두 마리 개를 집적거리는 한 마리 개사람

어긋난 천둥소리 같은 소란에 앞집 옆집

어둠도 빠져나간다

건드리면 덥석 물어버리는 끈끈이주걱 같은 개사람

숨죽이고 잠잠하기만 기다렸던 밤

 

별일 있냐는 듯 개사람이 마당으로 나온다

이눔 새끼들 왜 파놨어

흑룡이와 영심이와 내가 동시에 개사람을 쳐다본다

움찔거리다 삽을 든다

 

퉤, 성호를 긋는다

 

ㅡ『시인동네』(2020, 6월호)

 

 


 

이우림 시인

1995년 《시와 시인》으로 등단.  2012년 《문학과 의식》 수필로 등단. 시집으로 『봉숭아꽃과 아주까리』와 『상형문자로 걷다』 『허름한 개』 『당신에게 가는 길을 익히고 있다』. 포토에세이 『찔레꽃을 울리다』를 출간. 모윤숙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고양지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