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림 시인 / 을왕리 궤변
바다가 불러서 을왕리가 불러서 달려갔어 철조망에 갇힌 바다가 딴지를 걸었어 섬과 섬, 깍지 낀 손이 불편한 것은 해당화의 외도 때문일 거야 바다가 철조망에 갇히자 해당화도 모래톱을 잃었고 해풍도 철조망에 찢기고 갈매기도 조각난 하늘에 멈칫하고 문저리도 제 꼬리를 물고 바다를 들어 올렸고 어물쩡 코가 꿴 숭어 한 마리 묵은지를 불러다놓고 동어를 낳았어 그녀는 묵은지에 돌돌 말린 동어를 한 쌈 했어 김칫국인지 동어가 쏟아내는 양수인지 주루룩 흘러내리는 물을 연신 들이마셨어 눈알이 붉어지도록 감긴 동어 눈이 딱 한 번 치켜뜨도록 방향을 틀어 목구멍을 찾아가는 꼬리지느러미의 마지막 놀림 그녀는 바다를 삼켰고 동어는 심해(心海)를 꼬리쳐 갔어 또 하나의 바다가 생겼어 또 하나의 을왕리가 생겼어 내가 나를 낳았어
이우림 시인 / 구덩이와 개사람
충혈된 눈이 마당에 선다 구상나무가 질린 초록으로 내려다본다 땜질한 항아리 귀퉁이에 파인 구덩이 흑룡이와 영심이가 힐끔힐끔 내 눈의 신호를 기다린다는 듯이 어슬렁어슬렁 맴돈다 뜨끔하다 속내를 읽어버린 저들의 실행 앞에 지리고 만다
찻길도 깊이 잠든 지난 밤 귀가를 기대하지 않은 그가 들어온다 술독이 되어버린 발로 힘껏 대문을 차고 들어오는 개사람 집 안 가득 평화롭던 어둠이 긴장한다 흑룡이와 영심이 허둥대는 소리가 너울처럼 현관을 연다 마당 가운데 앉아 두 마리 개를 집적거리는 한 마리 개사람 어긋난 천둥소리 같은 소란에 앞집 옆집 어둠도 빠져나간다 건드리면 덥석 물어버리는 끈끈이주걱 같은 개사람 숨죽이고 잠잠하기만 기다렸던 밤
별일 있냐는 듯 개사람이 마당으로 나온다 이눔 새끼들 왜 파놨어 흑룡이와 영심이와 내가 동시에 개사람을 쳐다본다 움찔거리다 삽을 든다
퉤, 성호를 긋는다
ㅡ『시인동네』(2020,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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