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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진혁 시인 / 눈이 멀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5.

정진혁 시인 / 눈이 멀다

 

 

너에게 가 닿지 못한 이야기는 다 멀었다

눈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눈의 언저리를 한 바퀴 돌아갔다

바깥이 되었다

눈이 멀어서 밤이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었다

어떤 눈이 나를 송두리째 담아 갔다

 

문득 문이 열리고

306동 불이 켜지고

모퉁이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 갔다

세상은 공중인데 내 손은 사무적이었다

몇 발자국 세다 보면 길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눈이 고요하였다 끝이 넓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누가 먼눈을 들여다보랴

눈은 멀리서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먼 오후가 가득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정진혁 시인 / 사소한 동그라미

 

 

 파도 소리가 들리는 펜션에서 술을 마시는 밤이다 네가 별안간 일어나 우리의 둘레를 빙 돌며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말했다

 우리 이 금 안에 있는 것들과 이 금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기억하기로 해

 그 안에는 와인과 치즈 몇 조각 책 몇 권과 포인세티아 그리고 너와 우리가 있을 뿐인데

기억할 것도 없네 뭐 나는 단순하고 덜렁댔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웃음과 손짓 하나조차 관계 속에 있다는 것 창밖을 보는 눈길 하나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싶어

 

 넌 우리를 피곤하게 했다

 

 네가 그린 동그라미 안에서 사소한 하루가 커져 간다는 것을 난 알지 못 한다

 

 여기는 홀로 꽃이 피고 홀로 눈발이 날리고 홀로 파도를 일으키는 곳이야 고립과 관계의 지도가 그려진 곳이야

 

 너는 파도 소리처럼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사소함은 책의 페이지처럼 넘쳐났다 책속의 사건처럼 다양해졌다 동그라미는 자꾸만 커지고 포인세티아 잎처럼 초록이 붉음이 한 없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문득 부족했다

 

 저녁에 먹은 굴 향기도 몸도 없이 떠도는 일도 다 기억하기로 해

 

 사소한 생각 사소한 탄성 사소한 난처 사소한 연애 모든 것이 사소한 동그라미 안에 있다는 걸 나는 모른다

 

 


 

정진혁 시인

1961년 충북 청주 출생. 공주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등단. 시집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이 있음. 2009년 구상문학상 신인상 수상. 2013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2014년 천강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