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영 시인(청주) / 물의 살결
찰랑찰랑 흘러넘쳐 그려지는 벽면 위로 곰팡이처럼 스며 꽃은 피어나고 바람에 쓸려 구부러지는 물살을 한주먹씩 뜯어낸다. 손바닥으로 다듬어 물기둥을 세워놓고 손톱으로 세밀하게 긁어 무언가를 그리는 새들 물속 깊은 곳에 길을 내며 움직이는 물고기들이 밖의 사람들을 좌에서 우로 읽고 있다.
구름이 쏠려 한쪽 면으로 넘어지고 물살 위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두런두런 속삭이는 바람소리와 함께 들리는 깊은 밤 물살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밤바다소리가 난다. 뿌연 안개 속에서 물살이 일렁이고 저 멀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녀를 찍어놓은 점은 자꾸만 멀어져 가고 붓 끝에 매달린 검은 바다는 화선지 위에서 휘어지는 근엄한 역사를 그린다.
생은 깊어만 가고 습관처럼 팽팽하게 이어지는 긴장감 매듭을 끊는 마침표가 냉정하고 무섭다. 간이 배인 검은바다 한 모를 가는 명주실로 힘겹게 썬다. 접시위에 누운 살점에 양념간장 한 숟가락을 떠 머리위에 얹어준다. 떼어낸 살점이 접시 위에서 떨고 있다. 갑자기 풍경이 내 안을 기웃기웃 거린다. 투명하게 만져지는 그의 매끈매끈한 살결이 참으로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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