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리 시인 / 페스티벌
들끓는 인파.
새롭게 개장한 광화문 광장에서 아기가 놀고 있다 서투 른 걸음,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넘어진다. 기어가던 아기가 땅에서 손을 떼는 순간
직립한다.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지
인간의 탄생은 손에 있다. 손은 행복했고 따뜻했어. 손과 손의 결합으로. 손에 이끌려 학원을 가고. 손으로 회사 출입문을 해제하고. 손으로 뺨을 얻어맞으며
손을 잃고 주먹을 얻어. 땅따먹기 놀이에 빠진 세계.
손과 손의 결함으로.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 떨어지는 총알 사탕. 여자 친구는 두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끌려간다. 납작해지고 붉은 꽃물이 흘렀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공원에서. 검은 폭죽이 무성하여. 흰 깃발들이 숲을 이루는 환호. 어떤 함성보다 크고 고요하여 심장이 멈추는.
무수한 나뭇잎이 돌이킬 수 없는 손이 되어.
붉은 꽃잎 사이에서. 죽은 척했던 산 자가 일어난다. 겹쳐진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 겹쳐진 두개골을 들추고. 저세상 문 앞에서 빠져나온 어떤 사람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발트의 길*을 나서며
다시,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세요.
나와 당신과 저기 저 사람들과 여기 우기와 함께 손을 모아
이 땅에서 손을 떼도록
헬리콥터에 매달린 사람들과 폭격하는 독수리와 물에 빠진 비둘기와 총을 맨 아이들이 찬란한 핏빛 속에서. 넘쳐 흐르지 않게.
익수자는 허우적대며 손을 뿌리치고. 구조자는 동의를 얻느라 손을 망설인다. 어긋나는 물과 불이 되어도. 불꽃이 타오르는 향연에서, 서로 이별하지 않게.
손을 잡고 합창을 할까요.
미래의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씨앗들이죠.
나무가 된 사람들과 행성이 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뻗어
지구를 둘러싼 들끓는 손, 휘몰아치는 칼춤의 정점에서. 눈부시게 환한 나비가 되어 사뿐히 날아오르기를. 연인의 손을 잡듯이. 작은 떨림이, 우기를, 무기를, 멈추기를. 아이의 웃음소리가 무덤에서 먼바다로 흘러가기를.
다만, 노래하는 새와 포옹할래요. 발트*의 신발을 구름에 묶어 두면 좋지 않을까요 어디든 자유롭게
지구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누구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로부터
* 발트의 길은 1989년 발트 3국이 소련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주장하며 만든 인간 띠.
시집『인간사슬』(천년의시작, 2022) 수록
최규리 시인 / 액체 인간의 텍스트
바늘이 날아와 구성원의 목에 꽂힌다 이미 짜인 매뉴얼은 누구 하나 죽어야 쉽게 작동된다 의심하지 말자 무조건 빠르게 휩쓸려 가는 것이 공포를 이겨 내는 방법
몸을 뒤집고 굴러가며 물방울이 된다 다른 물방울과 결합하고 한 몸이 되고 돌이 되어 돈이 튀어 오르는 지상의 진동으로 어떤 밤이든 도망자가 된다
다가오는 감시자 앞에서
나는요 물렁해진 공이었다가 물이 되어서 아무 곳이나 둘 러싸여 있어요 어디든 스며들기 쉬운 포지션을 가져야 해요
익명의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 검은 호수에 떨어진 달을 따라 검은 해골을 밟는 존 레논의 〈이매진〉
게임을 시작한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슬픔이 되지만 죽였다고 생각하면 승리가 된다
작은 빗방울이 결합하여 공포에 맞서는 하나의 논리,
사과나무 한 그루로 살아가는 이유가 계획된 꿈이라고 할 때
하얀 쪽지에 적힌 글자는 영영 펼쳐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
살아 줘서 고맙다는 무서운 말일지도
벌레를 침대에 그려 넣는다 비가 오는 밤에 한 덩어리 슬픈 유리창에 매달려 결국 흘러내리는 눈물 기계들과
빠르게 뭉치고 빠르게 흩어지는 물이 되는 것이 공기의 미래라면
나는요 공기 중에 떠도는 수증기처럼 건조한 세상을 축축하게 하는 착한 미래가 될래요
창문이 없는 곳에 구멍을 내고 투명하게 유리는 온순해지고요 밖을 바라보며 벽은 푹신해지고요 물질과 멀어진 곳에서야 바람이 친절해지는
둥글게 뭉쳤다가 빠르게 증발하는 결말로 해피 엔딩이 보고 싶은 날에
극적으로 보이려고 지어낸 말들
마음대로 늘어나는 근로기준법과 뒷목 잡는 노동자의 한숨과 가족이 전부 가짜인 결혼식 안에서
언제나, 가까이 친절한 비극의 구름 떼,
연봉의 단위와 아파트의 층간 소음이 그렇고 집에 돌아와 흔적 없이 녹아내린 몸이 그렇다
모르겠다 어디로 이동되려고 몸이 녹는 걸까
멈춰 있는 것은 절대 견딜 수 없어서 바닥을 치고야 마는 근성
백마 탄 왕자는 달리지 않는다 우아한 손끝으로 말을 쓰다듬으며
말을 바꾸고 반지하를 거닐며 술잔을 기울인다
저기요 잠깐만요 풀잎 위에 붉은 융단을 깔고 대형 마트 도시락을 먹을까요 김치찌개를 먹을까요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면 그녀의 흰 블라우스 안에서 성형한 물방울이 부풀어 오를 테니
다 쓸어 낼 수 있는 장마가 좋아요
지하철역에 퍼붓는 집중호우 자주 우산을 잃어버리는 건망증과 계단을 떠도는 비 맞은 개와 파도타기 하는 술잔이 킬링 필드에서 빠르게 흘러간다
시집『인간사슬』(천년의시작,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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