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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준관 시인 / 산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2.

이준관 시인 / 산길

 

 

산길은 구부러져 있지.

구불구불 구부러져 산을 넘지.

넘다 한참씩 새소리에 귀를 묻고

넘다 한참씩 먼 구름에 한눈을 팔고,

 

산길은 늘 조금씩 늦지.

내가 먼저 산을 넘어와 한참을 기다리면

그때서야 호주머니 속에서

몇 포기 달콤한 풀내음과

아직도 도란거리는 물소리를 내어놓으며

미안해 미안해 빙그레 웃지.

 

때때로 산길은 산을 넘는 일을

잊어버리지.

찾아가 찾아가 보면 낯선 꽃덤불 속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지.

발자국 발자국 숨기고 잠들어 있지.

 

 


 

 

이준관 시인 / 간이역을 지나며

 

 

간이역에서 내려 늙은 이발사에게

바람에 산들거리는 보리 물결처럼

머리를 깎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팥시루떡을 쪄서 외양간에 갖다 놓고

송아지가 잘 자라게 해 달라고 빌고 나서

그 팥시루떡 목이 메이게 먹고 싶었는데

 

저녁연기 솟는 굴뚝을 보며

구정물 버리는 소리 부엌문 여닫는 소리

아이들과 강아지 부르는 소리 듣고 싶었는데

 

햇빛으로 빤들반들 닦아

살강에 엎어놓은 식구들의 밥그릇도

눈이 시리게 보고 싶었는데

 

기차는 간이역을 댓잎에

별빛 스치듯 지나간다

 

기적 소리만 뭉게구름처럼 뭉게뭉게 남기고

철길만 파란 하늘 비행운처럼 남기고

 

-시집 <천국의 계단> 서정시학 2014.12

 

 


 

이준관 시인

1949년 전북 정읍시 출생. 전주교대 졸업.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74년 심상, 신인상 시 당선 •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아동문학작가상, 방정환 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2006. 제19회 대한민국 동요 대상. 시집 『황야』 『가을 떡갈나무 숲』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 『부엌의 불빛』 『천국의 계단』 동시집 『크레파스화』 『씀바귀꽃』 『우리나라 아이들이 좋아서』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역임. 영등포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