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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서영 시인(평창) / 저녁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3.

이서영 시인(평창) / 저녁

 

 

너는 예술가를 닮았다

실눈을 뜨고 다가와

시간의 선을 비스듬히 긋고

빛을 삼켜 하늘자락에 흥건히 풀어놓는다

 

기지개를 켜며

새벽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시는 찰나에 스치던

내 하루의 이미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나를 완벽하게 숨기는 일도 내게는 어렵다

자칫, 오해를 부르는 일들

너처럼 그렇게 와서 무채색이 된다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면

낮에 있었던 일들이

자동차 전조등 불빛처럼 지나가고

마무리 채색을 마친 너는

어둠만큼 깊어질 숙제 하나 남기고

사라진다

 

 


 

 

이서영 시인(평창) / 그리움 2

 

 

풍랑이 지나간 바다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

기억 뜯어먹으며

거대한 몸집으로 헤집고 다닌다

종일 물고기 뛴다

 

 


 

 

이서영 시인(평창) / 사랑 꽃

 

 

엉겨 붙어 떨어질 수 없다

 

허물 벗으며 백일동안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하얗게 지새운 밤을 고스란히 이고 있다

 

흩날리던 꽃잎의 귀환

나는 눈꽃을 사랑 꽃이라 부른다

 

한철 짧게 피었다 떠난 꽃의 혼령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아찔한 행각

 

엎드려 귀를 막은 반야사 대웅전

못 들은 척 궁리가 많은 주지 스님

 

극락전 문살은 묵언 수행 중인데

오백 살 배롱나무는 뜨겁게 사랑 중이다

 

-시집 『경계의 뿌리』 진원(2016) 중에서

 

 


 

이서영 시인(평창)

1969년 강원도 평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1년 <서울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서울문학회회원, 인천문인협회 회원. 어울문학동인. 2016년 인천 남돋구 문화예술진흥기금 수혜로 시집 <경계의 뿌리>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