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영 시인(평창) / 저녁
너는 예술가를 닮았다 실눈을 뜨고 다가와 시간의 선을 비스듬히 긋고 빛을 삼켜 하늘자락에 흥건히 풀어놓는다
기지개를 켜며 새벽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시는 찰나에 스치던 내 하루의 이미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어렵다 나를 완벽하게 숨기는 일도 내게는 어렵다 자칫, 오해를 부르는 일들 너처럼 그렇게 와서 무채색이 된다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면 낮에 있었던 일들이 자동차 전조등 불빛처럼 지나가고 마무리 채색을 마친 너는 어둠만큼 깊어질 숙제 하나 남기고 사라진다
이서영 시인(평창) / 그리움 2
풍랑이 지나간 바다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 기억 뜯어먹으며 거대한 몸집으로 헤집고 다닌다 종일 물고기 뛴다
이서영 시인(평창) / 사랑 꽃
엉겨 붙어 떨어질 수 없다
허물 벗으며 백일동안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하얗게 지새운 밤을 고스란히 이고 있다
흩날리던 꽃잎의 귀환 나는 눈꽃을 사랑 꽃이라 부른다
한철 짧게 피었다 떠난 꽃의 혼령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아찔한 행각
엎드려 귀를 막은 반야사 대웅전 못 들은 척 궁리가 많은 주지 스님
극락전 문살은 묵언 수행 중인데 오백 살 배롱나무는 뜨겁게 사랑 중이다
-시집 『경계의 뿌리』 진원(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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