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경선 시인 / 종이의 나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24.

조경선 시인 / 종이의 나이

 

 

함부로 내뱉는 말 다 받아쓰는 문장은 늙어 있다

늘 가까이 있어 온몸이 구겨져도 처음은 나무

접고 또 접고 꼬아도 나무였고 꽃이었고 그 나무의 잎이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숲을 붙잡아 활활 태워

숲의 나이를 그려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종이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후미진 방에 앉은 종이가 낙서로 남아 구부릴 수조차 없을 때

당신의 무게중심은 지워지는 쪽으로 기운다

접혀진 페이지에서 날 것이 기어 나와 맹세가 떠돌던 속상처들

다시 써지는 고백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종이의 나이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얼룩져 있는 두께가 낱장으로 뜯겨나간다

넘겨야 하는 낱장이 더럽혀져 마지막이 와도 오래도록 추위를 뚫고 자란

나이테는 표정이 그대로다

 

종이의 여백은 나이를 모른다

보이지 않는 나이가 종이에 배여 있다

 

-시집 『개가 물어 뜯은 시집』, <달아실>에서

 

 


 

 

조경선 시인 / 폭탄

 

 

건드리면 터진다

 

바람도 피해간다

 

 


 

 

조경선 시인 / 양은냄비와 콩나물국

 

 

별다른 양념 없이 맛을 내는 국과 그릇

음식의 계보학이건

그릇의 가치이건

분명히 다르면서도 둘 사이가 닮았다

 

세상에 머리 내밀고

한쪽이 찌그러져도

비릿한 맛 익히느라

뚜껑은 조심스럽다

새벽을 뜨겁게 열어 어제를 맑게 푼다

 

외길로 자라나고

저렴한 태생이지만

익을수록 오래될수록

 

잊지 못할 언어들

재빨리 제 몸을 끓여 시원하게 일어선다

 

-《좋은시조》 2022년, 봄호

 

 


 

조경선 시인

1961년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 경희대 대학원 행정학과를 졸업. 2012년 《포엠포엠》에 시로  등단,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으로 『목력』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가 있음. 2014년  시흥 문학상, 천강문학상 수상. 2019년에는 시집 <목력木歷>으로 김만중문학상 신인상을 수상. <오늘의시조시인회의> 회원이며 <시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