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규 시인 / 눈사태
저렇게 격노하는 山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눈보라를 견뎌내야 한다. 쭈그리고 버틴 지 이틀째 새벽. 山 아래로부터 붉고 푸른색의 햇살을 쏘아 올리며 아침이 올라왔다. 구부린 허리 너머로 파란 하늘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장비를 챙기고, 고소증세로 메슥거리는 뱃속으로 알파미를 밀어 넣었다. 허벅지를 오르내리는 신설(新雪) 속에 크레바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 모른다. 눈 속의 허공과 눈 위의 허공을 건너야 한다. 발끝의 풍향계가 눈을 뜨는 그때 건너편 급사면으로 엄청난 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눈, 눈, 눈의 사태. 그렇게 山은 의욕(意慾)과 만용(蠻勇)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발걸음을 꾸짖고 있었다.
-시집 <크레바스>에서
최영규 시인 / 크레바스
할머니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 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놓았다
칼질을 당한 커다란 흉터였다 아니 긴 시간 날을 세운 깊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목을 뻗어 내려다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바닥 그 어두운 곳으로부터 빙하의 서늘한 입김 훅 올라왔다 색깔을 분간할 수 없는 기억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던 그런 어둠이었다 순간 주춤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두려움이 힘을 썼다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속박(束縛)의 공간
입구에서 떨어진 얼음 조각들이 섬광처럼 잠깐씩 반짝거리곤 깊은 얼음벽을 따라 나의 시선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함정
-시집 <크레바스>에서
최영규 시인 /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상에 풍경 따윈 없었다. 적막을 뒤집어쓴 허공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얼음의 숨결이 내 숨결을 막았다. 찰나의 환호성마저 바람이 잘라먹었다. 하지만 神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시집 <크레바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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