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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 정지용 프란치스코 (하)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8.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 정지용 프란치스코 (하)

열렬한 신앙을 노래한 정지용, 시대의 격랑 속으로 사그라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01.08 발행 [1694호]

 

 

 

▲ 1937년 성 프란치스코 재속회 착복식. 밑에서 세번째 줄 왼쪽 네번째가 정지용(점선) 시인이다. 맨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장면 박사,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장발 화백이다.

 

 

가톨릭 신자 정지용

 

정지용은 도시샤대학에 다닐 때, 교회 입교지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도시샤대학은 개신교 대학이었다. 지원서에 입교 동기를 “구원을 받고 싶은 마음의 요구 때문에”라고 적었다. 정지용은 대학 안에 있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정지용은 개신교 세례를 받은 지 채 1년도 안 되어 가톨릭으로 귀의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프란치스코’(方濟角)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정지용이 왜 가톨릭으로 귀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교토제국대학의 한 한국인 교수의 권유로 귀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녔던 한 한국인 학생이 쓴 글에 따르면 정지용은 가톨릭에 귀의한 후에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되어 신앙생활을 해나갔다고 했다. 어떤 국내 신문사가 정지용에게 책 추천을 의뢰했다. 이에 대해 정지용은 최근에 읽은 책 제목을 써주었다. 성경을 비롯해 「준주성범」, 「진화론과 가톨릭 정신」, 「가톨릭 사상사」, 「가톨릭교리서」. 모두 가톨릭 관련 책이었다. 이렇게 정지용은 가톨릭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이때 쓴 시가 ‘승리자 김안드레아’이다.

 

“새남터 우거진 뽕잎 아래 서서 옛 어른이 실로 보고 일러주신 한 거룩한 이야기 앞에 돌아 나간 푸른 물굽이가 이 땅과 함께 영원하다면 이는 우리 겨레와 함께 끝까지 빛날 기억이로다. … 오오 좌깃대의 목을 높이 달리우고 다시 열두 칼날의 수고를 덜기 위하여 몸을 틀어 대인 오오 지상의 천신 안드레아 김 신부! …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도 오히려 성교를 가르친 선목자 안드레아! … 오오 승리자 안드레아는 이렇듯이 이기었도다.”

 

정지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재일본조선가톨릭신우회 교토지부 서기로 봉사했다. 귀국해서는 서울 명동성당 청년회 간부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회 재속 회원이 되어 신앙생활을 더욱 굳건히 해나갔다. 또한, 조선 천주교에서 창간한 월간지 ‘가톨릭청년’의 편집을 맡으며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화가 장발 루도비코도 함께 편집일을 도왔다. 장발은 ‘가톨릭청년’과 ‘가톨릭소년’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 정지용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식 성화를 그린 장발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수도자처럼 경건하게 그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을 보고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2021년 2월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한 코너에 정지용과 장발의 ‘이인행각(二人行脚)’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자료가 나란히 전시되었다.

 

한편 ‘가톨릭청년’의 문예면은 1930년대 문단의 주요한 발표 무대였다. 이 잡지에 글을 쓴 사람은 당시 최고의 시인과 소설가였던 이상, 신석정, 김안서, 유치환, 이병기, 이태준, 박태원, 김동리 등이었다. ‘가톨릭청년’은 신자가 아닌 작가들에게도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가톨릭과 사회의 충실한 가교 역할을 했다.

 

정지용은 천주교에서 발행하는 ‘경향잡지’ 편집일을 맡았다. 경향잡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간된 잡지로 신자들에게 필요한 교리와 교양을 알려주었다. 또한,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한글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정지용은 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한 경향신문 초대 주필이 되기도 했다. 당시 경향신문 주간은 노기남 주교가 맡고 있었다. 노 주교는 정지용을 주필로 기용한 이유를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서 내가 종현성당(현 명동대성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부터 종현성당에 자주 드나들어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한, 일제가 공습을 이유로 서울 소개령을 내렸을 때, 정지용은 소사(현 부천)로 이사 갔다. 그곳 소사공소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정지용의 이웃에 살았던 사람은 “소사로 이사 온 정지용은 평일엔 기차로 서울에 있는 휘문학교까지 출퇴근하며 2세들을 위해 열심히 강단에 섰고, 일요일이 되면 집 바로 옆에 자리한 소사공소에서 공소 예절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렇듯 정지용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복음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 정지용(왼쪽에서 여덟 번째) 시인이 1939년 1월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재속 프란치스코회 허원식을 마치고 허원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친일도 배일도 못한 시인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지용은 친일파 문인들이 만든 ‘국민문학’에 일제 찬양 시를 썼다.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곯아진 흙에 싸흠은 이겨야만 법이요 씨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이토(異土)’에서)

 

정지용은 ‘문장’지에 일제 찬양 시를 쓴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친일도 배일도 못한 나는 산수(山水)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그래도 버릴 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인데 이 이상은 소위 국민문학에 협력하든지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신변의 협위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조선시의 반성’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던 가냘픈 지식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정지용은 해방되던 해 11월에 명동성당에서 상해에서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 나아가 축시 ‘그대들 돌아오시니’를 낭송했다.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정지용은 광복과 함께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옮겨갔다. 「이화 100년 야사」란 책에 정지용에 대한 일화가 적혀있다.

 

“1930년대의 한국 문단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이름을 드날리던 정 선생은 1945년 10월 개강과 함께 부임해서 3년간 국어와 영어, 라틴어를 담당했다. 애주가, 호주가인 데다 이름까지 비슷해서 학생들은 그에게 ‘정종’이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그의 기질과 휴머니즘을 좋아하고 따랐다. 눈 오는 겨울밤에 제자들과 마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서 넉넉잖은 월급을 털어 형제주점의 추어탕을 사주기도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가난한 시인이 가난한 학생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 정지용·송재숙 부부와 어린 시절 장남 구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광복 이후 좌익과 우익은 물불을 안 가리고 싸웠다. 이런 모습에 정지용은 크게 실망했다.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에 자신과 시대를 한탄하는 글을 실었다.

 

“재주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간다. …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敵)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어름 아래 다시 한 마리 이어(鯉魚)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정지용은 경향신문 주필과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녹번동 자택에서 은둔했다. 그러다가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 인사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 후 정지용에 대한 소식은 여러 갈래로 들려왔다.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다 경기도 포천 근처에서 포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정지용은 월북작가가 되었기에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은 남한에서 그의 작품은 일체 논의되거나 간행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에 따라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시인 신경림은 ‘동족상잔의 진흙밭에서 뒹굴기엔 역시 지용은 너무 고고하고 도도한 시인’이라 했다. 수필가 이양하는 “우리는 이제 여기 처음 다만 우리 문단 유사 이래의 한 자랑거리가 될 뿐 아니라, 온 세계 문단을 향하여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하고 부르짖을 수 있을 만한 시인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참고자료>=▲피천득. 금아문선. 일조각. 1980. ▲권영민 편. 정지용 전집(산문). 민음사. 2016. ▲권영민 편. 정지용 전집(시). 민음사. 2016. ▲정지용. 초판본 정지용 시집. 미르북. 2021. ▲월간조선. 문인의 유산, 가족 이야기(정지용의 손자 정운영). 2015.3월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잃어버린 시인 정지용 신앙시 다시 읽기’. 2012.10.25. ▲신경림.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우리교육. 1998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