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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진형 시인 / 신성한 숲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

박진형 시인 / 신성한 숲

 

 

 그을린 입술로 사려니숲을 껴안는다.

 발걸음은 숲길에서 헐떡이다 잦아든다. 원시 바람 부풀어 오르고 심장은 숲을 두드린다. 바람은 하늘을 낚고 바다를 휘몰고 간다. 하늘의 눈 찌르듯 바다가 물보라 친다. 날것의 비린내가 숲속으로 스며든다. 구름이 날아오는가, 머리와 발 찾으러. 욕망으로 자라나는 우듬지가 숲길 따라 머리 자락에 붉은 태양 한 점으로 떨어진다. 까마귀 날갯짓은 눈꺼풀을 물어뜯는다. 욕망이 돛을 펼치며 나무껍질을 휘감는다. 신성한 숲의 기다림은 언제나 길고 절정은 늘 짧으니 천둥은 길을 잃지 않으려 구름 둘레 서성인다.

 귓불을 끝없이 간질인다, 관능적인 나무 잎사귀.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 아나키스트 여행

 

 

파도 소리 유혹해도 방풍림은 꿋꿋하다

 

애인은 언제 올까

발목으로 견딜 때

허기는 어둠을 삼켜 여독을 재우는데

 

놓쳐버린 이정표가 지도를 지워간다

 

눈동자 사라진 곳에 새로운 길 보일지

배낭은 젖지 않은 채 수평선을 넘본다

 

모래밭에 새긴 이름

별에 묻혀 사라진 밤

 

​보고 싶은 사람은 왜 멀리 있는 것일까

 

등대는 상처를 담아 밤의 끝을 쫓는다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 정오의 바다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1제주, 4월

정오를 가리키며 명전하는 해시계

오싹한 4월의 공기 외딴 섬을 휘감아

불길은 돌을 태우고

바람은 흙을 흩는다

#2올레길

올레길 할머니가 굽은 등 업고 간다

살아남은 고통은 혼자만의 몫인지

말없이 진저리 쳐도

끝내 살아야 한다

#3북촌포구

저승까지 가지고 갈 테왁과 망사리

물질 끝낸 해녀들이 윤슬로 물드는데

태양은 정오를 삼켜

암전하는 북촌포구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 브로콜리 열반

 

 

옹 다문 봉오리로 꽃대를 밀어 올려

온몸에 스민 얼룩 연두 방울로 닦아내면

꽃순은 아이의 미소로

볼록한 빛깔 된다

처음 만난 녹색 물결 부들부들 곡선미

흔들리는 꽃자리 미혹을 어루만질 때

둘레에 아무도 없다

나를 보는 오백 나한

초록색 꽃봉오리 상큼해 눈 감는다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천 개의 미소

누추함 벗어던지고

날아오르는 꽃숭어리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전남 구례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학사, 불어불문학과 석사, 외국어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1989년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소설 당선. 2016년 《시에》로 시부문 등단.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용인문학회 편집위원, Volume 동인 회장, 시에문학회 부회장, 시란 동인.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