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형 시인 / 신성한 숲
그을린 입술로 사려니숲을 껴안는다. 발걸음은 숲길에서 헐떡이다 잦아든다. 원시 바람 부풀어 오르고 심장은 숲을 두드린다. 바람은 하늘을 낚고 바다를 휘몰고 간다. 하늘의 눈 찌르듯 바다가 물보라 친다. 날것의 비린내가 숲속으로 스며든다. 구름이 날아오는가, 머리와 발 찾으러. 욕망으로 자라나는 우듬지가 숲길 따라 머리 자락에 붉은 태양 한 점으로 떨어진다. 까마귀 날갯짓은 눈꺼풀을 물어뜯는다. 욕망이 돛을 펼치며 나무껍질을 휘감는다. 신성한 숲의 기다림은 언제나 길고 절정은 늘 짧으니 천둥은 길을 잃지 않으려 구름 둘레 서성인다. 귓불을 끝없이 간질인다, 관능적인 나무 잎사귀.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 아나키스트 여행
파도 소리 유혹해도 방풍림은 꿋꿋하다
애인은 언제 올까 발목으로 견딜 때 허기는 어둠을 삼켜 여독을 재우는데
놓쳐버린 이정표가 지도를 지워간다
눈동자 사라진 곳에 새로운 길 보일지 배낭은 젖지 않은 채 수평선을 넘본다
모래밭에 새긴 이름 별에 묻혀 사라진 밤
보고 싶은 사람은 왜 멀리 있는 것일까
등대는 상처를 담아 밤의 끝을 쫓는다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 정오의 바다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1제주, 4월 정오를 가리키며 명전하는 해시계 오싹한 4월의 공기 외딴 섬을 휘감아 불길은 돌을 태우고 바람은 흙을 흩는다 #2올레길 올레길 할머니가 굽은 등 업고 간다 살아남은 고통은 혼자만의 몫인지 말없이 진저리 쳐도 끝내 살아야 한다 #3북촌포구 저승까지 가지고 갈 테왁과 망사리 물질 끝낸 해녀들이 윤슬로 물드는데 태양은 정오를 삼켜 암전하는 북촌포구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박진형 시인 / 브로콜리 열반
옹 다문 봉오리로 꽃대를 밀어 올려 온몸에 스민 얼룩 연두 방울로 닦아내면 꽃순은 아이의 미소로 볼록한 빛깔 된다 처음 만난 녹색 물결 부들부들 곡선미 흔들리는 꽃자리 미혹을 어루만질 때 둘레에 아무도 없다 나를 보는 오백 나한 초록색 꽃봉오리 상큼해 눈 감는다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천 개의 미소 누추함 벗어던지고 날아오르는 꽃숭어리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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