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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양 시인 / 마왕은 우리에게 순서를 잊으라고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

이진양 시인 / 마왕은 우리에게 순서를 잊으라고

 마왕은 우리에게 가로수의 마음을 잊으라고. 눈의 내림과 솟구침에 관여하는 숨바꼭질에 더 이상 참여하지 말라고. 확성기 소리가 잦아들고 우리는 갖고 싶던 빌딩들이 함박눈으로 쏟아지는 숲을 지나 무시무시한 마왕에게 갔다. 예상대로 검은 망토를 두르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서 깔깔거리는 저 천진함; 집채만 한 가위를 쥔 손은 주위의 어둠을 자르고 있었다. 자기 그림자를 자르며, 빛으로 온몸을 낙서하며 마왕은,

 

 "너희들은 언제나 순서를 잊으라고!”

 

 우리 중 몇몇은 사라졌고 몇몇은 잠이 들었다. 혼자 우는 마왕의 뒷모습을 주스로 마시고서 취한 친구도 있었다. 밤새도록 우리가 서로에게서 도망칠 방법을 귓속말하는 동안, 마왕은 철문에 귀를 대고 그 이야기들을 채집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까운 미래에서 세발자전거 타고 서성이다 눈이 맞아 짝짓기하는, 미성년들의 두근거리는 생쥐 소리로; 찍- 찍- 찍-

 

 ‘나는 여기서 뱃속에 칼날 자라나는 마음으로 잠들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잠이 사라진 뒤에도 잠자리 수많은 퍼즐의 눈으로 불어나는 두려움이여! 나는 오로지 깜빡하는 법만을 잊어버리겠다!’ 해맑게 웃는 마왕은 철문을 꽝꽝 걷어차며, 조금 전 내가 소리 지른 말들의 속내는 잊으라고. 너희는 그냥 기계적으로 뻐끔거리는 단두대가 되라고.

 

 진눈깨비가 처음 마주쳤던 마왕의 눈빛으로 솟구치는 밤에도 우리는 결혼식을 멈추지 않았다. 멍청이와의 결혼. 뚜쟁이와의 결혼. 절름발이와의 결혼. 결혼을 계속할수록 우리는 죽기 직전의 마왕으로 변해가고, 허탈한 마왕은 그때마다 헛웃음을 알로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알에서 깨어난 한 마왕이 폭력배처럼 보이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애꿎은 마왕의 알을 망치로 내려치고. 음흉한 미소를 띠며, 목구멍에는 커다란 새의 날개뼈가 걸린 듯 까끌까끌한 신음을 내면서……

 

 우리는 각자의 병실로 도망쳐 형광등으로 깜빡거리는 흰 새들을 구경하였다. 이러다 문득 각자의 마왕이 다 닳아버리면 어떡하나? 먼 훗날 저 새들도 지쳐서 어느 마왕을 단숨에 닮아버리면 어떡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남몰래 교회의 첨탑 위로 올라간 한 마왕은 세상 모든 깜빡거리는 것들을 가루약으로 입속에 털어 넣으며,

 

 "너희도 낮은 곳에서 멀리멀리 벗어나라고……”

 

 살아남은 마왕들에게 존댓말을 침처럼 내뱉는 훈련을 끝마치고서 신비로운 마왕을 찾아 망토를 펄럭거리며 날아오르는 숲, 방탄을 쓴 어린 마왕은 내게 물었다. “마왕을 다시 배고프게 하려면, 마왕의 속을 텅텅 비워서 가죽뿐인 마왕에게 환심을 사려면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 거야?”

 

 나는 오래된 기계 낙타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이 낙타는 어미 기계의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차가운 곳을 향해 걷고 있어. 그리고 등 뒤에는 두 개의 혹이 활화산으로 솟구쳤지. 넌 늘 그렇게 솟구치면 되는 거야. 솟구쳐 무섭게 기다리면서 너도 모르게 게을러지면 새로운 마왕은 그때 네 마음을 알아차리고 헤어진 사람으로 다가올 거야, 차마 말해주진 못하고

 

 다시 칼날로 울창한 숲속에서; 어린 마왕은 바다 갈매기 흉내를 내고 있었다. “요즘엔 멀리멀리 나는 법을 잊어버리는 게 유행이야. 깊은 바닷속을 헤매는 느낌으로…” 순식간에 늙어버린 마왕은 우리가 오기 전까지 끊이지 않고 혼잣말했다. “너희가 둘인지 셋인지 혹은 무한인지도 모르니까 나는 아무렇게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거야……잡아먹어야 할 포악함을 골라야 하는 슬픔이 내게도 있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우리에게 마왕은 그렇게 속삭이며, 우리가 한참을 얼어있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을 때, 그는 눈물에 젖은 편지지 한 장을 수줍게 내밀었다. 편지지에는 그리다 만 마왕이 해맑게 웃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마왕은 우리로 변신해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너는 오늘 밤 우리들 입김을 사냥하지 말라고!”

웹진 『시인광장』 2023년 2월호 발표​

 


 

이진양 시인

1993년 광명에서 출생. 2021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