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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춘리 시인 / 모자 속의 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

김춘리 시인 / 모자 속의 말

 

 

애쓰는 말은 잡식성 동물

말은 내가 내뱉는데

채찍과 고삐는 타인이 쥐고 있다

 

소의 뿔과 몸집은 어느 쪽이 주인일까

 

애쓰는 말이 주인일까

소 같은 말이 주인일까

 

채찍과 고삐를 휘두르는 건

편두통 때문일까 뿔 때문일까

타이레놀 두 알이면 뿔이 날아갈까

 

뿔을 모자에 감춰 보지만 자꾸 뚫고 나오네

 

모자를 벗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것은 말

뿔은 말의 주인일까

 

버티는 힘으로 애를 쓴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난다

 

애쓰는 말이 들린다

 

 


 

 

김춘리 시인 / 커서스Cursus

-매일하는 기도의 일정한 순서

 

 

톱이 있습니까? 도끼가 있습니다.

창문을 부술 작정이군요

가지를 잘라낼 생각입니다

풍경들이 잘리면

우리들이 사다 놓은 얼굴들을 볼 수 있을까요?

 

알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매뉴얼은

혼인서약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입구와 출구가 다른 근황들이 빨래줄에 걸려 있고

체념은 열쇠꾸러미와 나침판과 샌들을 널어놓기도 합니다

 

콜라병에 꽂혀 있는 오렌지는 식욕이어서

열쇠는 헛돌고 오렌지는

둥둥 떠다닐 뿐 간격이 잡히지 않습니다

국수건지는 체는 꼭 필요합니다

오렌지는 체긁는 소리를 좋아하니까요

 

눈 쌓인 지붕을 비너스라고 단정 짓는 순간

콜라 속 탄산이 터지고

탄산은 트렁크로 바뀝니다

열쇠꾸러미와 나침판과 샌들이 의자에서 벽으로 벽에서 망치로

 

트렁크에 담긴 물건들

 

불꽃은 베이스캠프입니다

잘라낸 후에 보이는 것들

 

혼잣말하는 빈방입니다

 

- 계간 《시사사≫ 2022년 봄호에서 -

 

 


 

김춘리 시인

1952년 강원도 춘천 출생. (본명: 김춘순. 필명: 김지혜). 수원여대 졸업. 사회복지사.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12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2년도 천강문학상 우수상 수상, 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모자속의 말> <평면과큐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