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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유하(한라) 시인 / 눈물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5.

박유하(한라) 시인 / 눈물점

 

 

태운 점이 눈 밑에 다시 돋아났다

눈물 날 일이 많을 것이라는 미신迷信은 미신美信에 불과했지만

다시 돋아난 점이 전조로 느껴졌다

기상청이 소풍 가는 날 비가 왔다는 농담이 좋았다

카오스는 카오스일 뿐이었으나

사람들은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점의 뿌리는 예상보다 깊었다

잘못 점을 뽑으면 흉터가 깊게 남는다고 의사가 말했다

마른 우산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잘 지내 보인다는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눈 밑 점이 간지러운 듯이 긁는 습관이 생겼다

선배도 잘 지내시고 다음에 봬요

나는 언제 만날지 모를 약속을 기상청에서 ‘싸락눈이 내릴 것’이라고

점 쳐주길 바랐다

내려도 쌓이지 않는 일상들이 계속되었지만

나이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수상했다

내가 사는 것조차 미신 같을 때에도

눈물점이 눈물을 점쳐주는 내력이 삶처럼 느껴졌다

 

『시와경계』(2017년 겨울호)

 

 


 

 

박유하(한라) 시인 / 물의 일기

 

 

 휘장을 데운 열기가 바닥까지 내려온다 어시장 사람들은 바닥에 깔린 물에 삶을 내려놓는다 높이 나는 바닷새가 물 바닥에서 어른어른 날개를 휘젓다 사라진다 비리고 지린 바람은 거리의 껍데기다 이따금 앉은 새 한 마리가 자꾸 물의 내면을 부리로 콕콕 찌른다 수채화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활이 잘 마르지 않아서 자주 번진다 오래 살아남은 물의 표변에 여러 번 지워진 하루들이 때처럼 거무스름하게 끼어 있다

 

시집 『탄잘리교』(천년의시작, 2022)

 

 


 

 

박유하(한라) 시인 / 고양이 안테나

​​

 

이십 년 전 구름을 향해 꼬리를 들어 올린다

해진 털이 지난 하늘로부터 과거를 수신하고 있다

 

부드러운 털을 먹고 자란 무성한 시간은

바람 가운데 오래 버려진 고양이를 낳았다

 

보름달을 핥으며 몸을 굴리던 하루들이

마른 비듬 같은 싸락눈이 되어 떨어진다

 

고양이는 남은 털을 곧추세운다

이제 계절을 탄 바람의 끝자락이 강신호로 내려올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기억 사이로 새는 바람의 음표들이 밤을 각색한다

생식기를 단 울음들이 와락 덤벼들어 어둠이 번식하는 도중에도

물고기를 낚아채듯 고양이는 전파의 입을 덥석 문다

 

십 년 전 뜬 싱싱한 주파수가 꼬리에 붙어 전희처럼 내려온다

전파를 헤엄쳐 온 밤하늘의 음량이 점점 높아진다

 

지는 꽃잎처럼 오늘의 얼굴이 차츰 벗겨진다

내일은 고양이 자리 주파수가 새로 뜰 것이다

시집 『탄잘리교』(천년의시작, 2022)

 

 


 

박유하(한라) 시인

1987년 충남 논산 출생. 박유하(朴有廈). 2012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통해 등단.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시집 『탄잘리교』. 한남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