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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수연 시인 / 지붕 수집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5.

배수연 시인 / 지붕 수집가

 

 

나는 지붕을 바꾸고 다니는 거인

지붕 수집가

 

거인이라면 기다란 꼬챙이로 밤을 찔러봅니다

푹 익어 밤의 반대편까지 관통하는 밤이라면,

거인이 움직입니다

그날은 아무리 느린 거인이라도

세상 끝에서 끝까지 다녀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날아봅니다 괜히 발끝을 휘저어봅니다

떼를 지어 날던 거북이들 채여 나갑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지붕을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사실 거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인간들도 상자를 열어보길 좋아하니까요

심지어 인간은 상자 안에 들어가 삽니다

하지만 거인은 어떤 상자에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거인입니다

 

마음은 고요합니다

지붕들의 배치는 어떻습니까

딱히 지붕이랄 것도 없는 빌딩들은 불행한 번역처럼 서 있습니다

 

나는 러시아의 궁전과 영국의 작은 극장과 일본의 성공회 성당과

케냐의 유치원과 한국의 향교와

산동네의 지붕들을 쓰다듬습니다

어떤 것은 서로 바꿔 놓고 어떤 것은 자루에 넣어둡니다

 

거인은 어떤 지붕 아래도 들어갈 필요가 없으므로,

거인입니다

나는 가져온 지붕들을 모아놓고 잠이 듭니다

지붕들은 내게 잘 보이려는지 오래도록

헝클어진 정수리를 다듬습니다

 

 


 

 

배수연 시인 / 검은 욕조

 

 

2막에서

검은 욕조가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검은 욕조에 담긴 물은 맑아서 검습니다

네 개의 바퀴 위로 굽은 우아한 발목

우우우웅

욕조가 움직입니다

주춤거리는 백조들의 군무

 

검은 욕조 속으로 오렌지 하나 가라앉습니다

아직도?

 

조금씩 욕조가 빨라집니다

당황한 백조들 목을 빼고 날개를 휘젓습니다

고개를 꺾고 깃털을 흘리면서

코르 드 발레*, 솔리스트와 프리마돈나

누구의 오렌지인가

백조라면 모두 여기서 목을 축였으니까

오렌지가 빠진 백조의 가슴은 더 납작해졌으니까

 

코르 드 발레, 솔리스트와 프리마돈나

예리한 균형

 

첨탑으로 달아난 백조들이

검은 욕조 안으로 떨어집니다

관객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오렌지를 건진 손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 솔로를 추지 않는 발레리나, 군무를 담당한다.

 

 


 

배수연 시인

1984년 제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와 철학 전공.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조이와의 키스』, 『가장 나다운 거짓말』이ᅠ있음. 중학교 미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