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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6) 피천득 프란치스코 (하)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2.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6) 피천득 프란치스코 (하)

밀레의 ‘만종’ 타고르의 시 한구절에서도 신앙을 느낀 피천득

가톨릭평화신문 2023.02.12 발행 [1698호]

 

 

 

피천득은 평범하고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했다.

 

 

▲ 사진은 노년의 피천득.

 

 

피천득의 신앙 고백

 

피천득은 가톨릭평화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이야기했다.

 

“난 아직도 그때 들어선 그 문턱에서 서성거리고 있어요. 신앙에 충실치 못한 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아직 내가 믿는 바는 하늘에 군림하시는 전지전능한 신이기보다는 불쌍한 우리들 속에서 고뇌를 같이 하시고 우리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주시는 인간적인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공경하는 성모 마리아는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순결의 상징입니다. 그 순결미는 어느 종교적 진리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천득은 좋은 기도란 바로 ‘감사의 기도’라고 했다. 자신의 방에 노인이 수프 한 그릇, 빵 한 조각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소박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바로 종교의 본의(本意)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릎을 꿇고 고요히 앉아 있는 것도 ‘기도’라고 했다. 말로 표현하건 안 하건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으면 그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브루흐의 ‘콜니드라이’와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는 음률로 나타낸 기도이고, 엘 그레코의 ‘산토 도밍고’와 밀레의 ‘만종’은 색채로 이뤄진 기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로 드리는 으뜸가는 기도는 마태오 복음서 6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라고 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피천득은 타고르의 ‘기탄잘리’ 한 구절인 “저의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딜 수 있는 그 힘을 저에게 주시옵소서”를 좋아했고, 자신이 읽은 짧고 감명 깊은 기도는 “저희를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했다. 피천득은 눈물은 인정의 발로이며 인간미의 상징이며 성스러운 물방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아름다운 데를 묻는다면, 루카 복음서 7장, 죄지은 여자가 예수님의 발 위에 자신이 흘린 눈물을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서 바르는 장면이라고 했다. 또한, 미술품으로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고 했다. 피에타에는 마리아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있다고 했다. ‘피에타’는 성모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아들 예수님을 끌어안고 있는 처절한 모습이다. 고개를 숙인 성모님의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미술평론가는 성모님의 그 표정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라 했다.

 

사랑하는 이를 외면한 까닭

 

피천득이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으로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주요섭, 윤오영을 들 수 있다.

 

피천득이 중국 상해로 유학 가게 된 동기는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도산을 처음 만난 느낌을 “용모·풍채·음성 등 모든 것이 고아하였다. 그의 인격은 위엄으로 나를 억압하지 아니하고 정성으로 나를 품 안에 안아버렸다”라고 했다. 도산이 잠깐 나간 틈을 타서 도산의 모자를 써 보기도 하고 도산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와 비슷한 것을 구입하기도 했다. 도산을 닮고 싶어서였다. 피천득이 심한 병이 들었을 때 도산은 피천득을 차에 실어 상해 요양원에 입원시켰고, 겨울 아침 일찍이 문병을 오기도 했다. 그런데 피천득은 도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피천득은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보다도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렇듯 피천득의 첫 번째 스승은 도산이었다.

 

다음으로 존경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였다. 피천득은 춘원을 “싱싱하고 윤택한 오월의 잉어”라고 했다. 춘원은 피천득에게 워즈워드의 ‘수선화’를 비롯해서 수많은 영시를 가르쳐 주었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게 했고, 인도주의 사상과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피천득은 춘원을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춘원은 가톨릭 신부나 승려가 될 사람이었다. 동경 유학 시절, 길가의 관상쟁이가 춘원을 보고 출가할 상이나, 눈썹이 탁해서 속세에 산다고 했다. 피천득이 경기부속국민학교 때 검정고시를 보고 두 해 빨리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에 들어갔을 때 그의 재능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춘원이었다. 당시 춘원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춘원은 고아였던 피천득에게 깊은 동정심으로 느끼고 자기 집에서 3년 동안 데리고 살았다. 춘원은 피천득의 두 번째 스승이었다.

 

그리고 피천득은 여덟 살 위인 소설가 주요섭을 ‘친형보다 더한 존재’라고 했다. 주요섭을 만난 것은 열일곱 살 때, 중국 상해였다. 주요섭은 당시 호강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학교로 찾아간 피천득을 YMCA 식당에 데려가 저녁을 사주었고, 주말이면 영화를 구경시켜주었다. 주요섭은 특대생이었고, 영자신문 주간이었다. 모든 학생이 주요섭을 흠모했다. 피천득은 그를 이상적인 인물로 보았다.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는 피천득 어머니에 대한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또한, 피천득은 수필가 윤오영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 피천득은 윤오영을 정으로 사는 사람으로 서리같이 찬 그의 이성이 정에 용해되면서 살았다고 했다. 윤오영은 양정고보를 졸업했다. 그는 밤이면 송강 정철과 노계 박인로를 읽고 연암 박지원을 숭앙했다. 그리고 중국의 노신을 좋아했다. 또한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와 「장자」도 탐독했다. 그는 해방 후 보성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30년간 근무했다. 피천득은 윤오영을 ‘조지훈 이후로 남은 그리고 미래에도 있을 선비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윤오영은 피천득의 글에 대해 산곡(山谷) 간에 옥수 같이 흐르는 맑은 물로 그 시냇물의 밑바닥에는 거친 돌부리와 아픈 자갈이 깔려 있다고 했다.

 

피아노 소나타 31번

 

피천득이 문학 작품을 보고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은 셰익스피어, 도연명, 로버트 프로스트, 찰스 램이었다.

 

피천득은 셰익스피어를 보고 ‘사람은 신과 짐승의 중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 자체라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세대를 초월한 영원한 존재’라고 했다. 또한, 민주 국가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피천득은 “나는 그저 오늘도 도연명을 생각한다”고 했다. 피천득은 시끄러운 도시 생활을 싫어했다. 그래서 도연명처럼 아홉 평 집 마당에 꽃을 심었고, 울타리에는 국화를 심었다. 그러면서 도연명을 늘 생각했다. 도연명이 쓴 유명한 시 「귀거래사」에는 “젊어서부터 속세에 맞는 바 없고, 성품은 본래 산을 사랑하였다. 잘못 도시 속에 빠져 삼십 년이 가버렸다”라는 구절이 있다. 도연명은 마흔한 살에 귀거래 했는데 자신은 쉰 살이 되는데 늙은 말 같은 몸을 채찍질하며 잘못 들어선 길을 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피천득은 미국에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만났다. 그를 정직한 사람, 순박한 사람, 지성을 뽐내지 않는 사람, 인생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프로스트의 시는 뉴잉글랜드 과수원에 사과가 열리고, 겨울이면 그 산과 들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이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정성껏 번역했는지도 모른다.

 

피천득은 평범하고 정서가 섬세한 사람, 동정(同情)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수줍어하고 겁 많은 사람, 순진한 사람, 아련한 애수와 미소 같은 유머를 지닌 사람을 좋아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찰스 램이었다. 찰스 램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오래된 책, 옛날 작가, 그림과 도자기를 사랑하였고, 작은 사치를 사랑했다. 또한, 어린 굴뚝 청소부들을 사랑했다. 그들이 웃으면 따라 웃었다. 그는 램(羊)이라는 자기 이름을 향해 “나의 행동이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나의 고운 이름이여”라고 했다. 사람들은 피천득이 찰스 램과 취향이 비슷해 ‘한국의 찰스 램’이라 부른다.

 

피천득은 하루에 세 시간 이상 클래식을 들었다. 음악을 들을 때는 “잃어버린 젊음을 안갯속에 잠깐 만난다”고 했다. 그의 시 ‘이 순간’에서도 “오래지 않아 /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 이 순간 내가 / 제9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라고 음악을 찬양했다. 피천득은 베토벤을 가장 좋아했다. 피천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이 울려 퍼졌다. 피천득은 살았을 때,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장례식장에 소나타 31번을 미리 부탁했었다. 피천득은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묻혔다. 그곳에 제자들이 시비를 세웠다. 시비에는 스승이 가장 좋아했던 시 ‘너’가 새겨져 있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오는 주말에는 잠실에 있는 금아기념관에 갔다 오려 한다. 잠실 석촌 호수 겨울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참고자료 : ▲피천득. 수필. 범우사. 1976. ▲피천득. 피천득 시집. 범우사. 1987. ▲피천득. 생명. 샘터. 1997. ▲피천득. 금아문선. 일조각. 1980. ▲피천득. 어린 벗에게. 여백. 2002. ▲정정호. 피천득 평전. 시와진실. 2017. ▲정정호 엮음.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샘터. 2014.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