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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유환 시인 / 여름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9.

강유환 시인 / 여름밤

 

 

아가 며늘아가 내 밥은 하지 마라

배롱나무 꽃 피어 환한 저녁

오늘 하루 온전하게 살아있던 것들이

차츰 몸짓을 거두어 가는구나

활활 타오르며 굼트대던 해도

까마득한 바 속으로 한번 사라지면

지금 넘어간 것처럼 똑같은 모양을

공중에다 내어놓을 수 있을까

아스라이 떠 있는 저 초저녁달이

어제 본 그 얇은 달의 저 초저녁달이

어제 본 그 얇은 달의 후생이라고

누가 큰 소리치며 말해줄 수 있겠는가

너와 내가 지친 날개를 파닥이며

빨아올리던 핏방울들이 정말 선연하게

우리 몸에 들어 있었던 것인가

그림자 무성한 나무 아래 모여

삼삼오오 저리 밝게 웃는 순간들이

살아있는 날들의 한 모습이었다고

자신있게 기억해낼 이가 있을까

심지를 올리고 있는 저 꽃들이

금세 꽃불 꺼버리고 속절없이 지는 저녁

후한 놈 만나면 배불리 먹을 것이고

모진 놈 만나면 곧바로 곧바로 맞아 죽어서

한 겹 고단한 삶을 오늘 접을 것이니

어차피 오늘 내 저녁밥은 소용없다

오래전 어떤 여름날 그 하룻밤

물것들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이야기를

가만가만 내 귓가에 내려놓던 할머니도

어둠을 휘저으며 손부채질 해주던

쑥불 잦아든 그 마당을 기억이나 할까

 

-시집 『꽃, 흰빛 입들』에서

 

 


 

 

강유환 시인 / 어둠별

 

 

바닥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한때는 누구나 바닥이어서

닿고도 알지 못했을 일

만나고도 몰랐을 일

다 버리면 될 수 있나

되면 부서지는데

부서져야 닿을 수 있는데

 

바닥에서 반짝이는 그대

밤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멀고 어두워 아름다운 바닥이여

다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내려가지 않을 것이어서

 

- 시집『고삐 너머』,천년의시작, 2020.

 

 


 

강유환 시인

1961년 전남 무안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2000년 계간《시안》 가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꽃, 흰빛 입들』 『고삐 너머』가 있고, 논저 『존재, 그 황홀한 부패』 『매혹과 크레바스의 형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