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환 시인 / 여름밤
아가 며늘아가 내 밥은 하지 마라 배롱나무 꽃 피어 환한 저녁 오늘 하루 온전하게 살아있던 것들이 차츰 몸짓을 거두어 가는구나 활활 타오르며 굼트대던 해도 까마득한 바 속으로 한번 사라지면 지금 넘어간 것처럼 똑같은 모양을 공중에다 내어놓을 수 있을까 아스라이 떠 있는 저 초저녁달이 어제 본 그 얇은 달의 저 초저녁달이 어제 본 그 얇은 달의 후생이라고 누가 큰 소리치며 말해줄 수 있겠는가 너와 내가 지친 날개를 파닥이며 빨아올리던 핏방울들이 정말 선연하게 우리 몸에 들어 있었던 것인가 그림자 무성한 나무 아래 모여 삼삼오오 저리 밝게 웃는 순간들이 살아있는 날들의 한 모습이었다고 자신있게 기억해낼 이가 있을까 심지를 올리고 있는 저 꽃들이 금세 꽃불 꺼버리고 속절없이 지는 저녁 후한 놈 만나면 배불리 먹을 것이고 모진 놈 만나면 곧바로 곧바로 맞아 죽어서 한 겹 고단한 삶을 오늘 접을 것이니 어차피 오늘 내 저녁밥은 소용없다 오래전 어떤 여름날 그 하룻밤 물것들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이야기를 가만가만 내 귓가에 내려놓던 할머니도 어둠을 휘저으며 손부채질 해주던 쑥불 잦아든 그 마당을 기억이나 할까
-시집 『꽃, 흰빛 입들』에서
강유환 시인 / 어둠별
바닥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한때는 누구나 바닥이어서 닿고도 알지 못했을 일 만나고도 몰랐을 일 다 버리면 될 수 있나 되면 부서지는데 부서져야 닿을 수 있는데
바닥에서 반짝이는 그대 밤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멀고 어두워 아름다운 바닥이여 다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내려가지 않을 것이어서
- 시집『고삐 너머』,천년의시작,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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