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빈 시인 / 책에 관한 명상
푸른 바람을 번역하는 잎새와 붉은 풍경을 덧칠하는 태양 불의 기억처럼 거친 숨을 고를 때 아름답게 모호한 암호들을 한 가지 색으로 읽어내네
붉은 생각을 흔드는 가지와 푸른 노래를 꿈꾸는 뿌리들 물의 기억처럼 반짝이며 뒤척일 때 명상에 빠진 열매의 생각들을 만 가지 꽃으로 펼쳐보네
순리를 역행하는 물관과 대지의 질서 속에 순응하는 체관 사이 해독 불가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길들이여, 돌고 돌아 제자리 나이테의 시간들을 가늠하네
상상은 직립 이후부터 계속되었고 기록은 정리 이후부터 하여온 일 물을 쓰고 불을 읽네 대지를 노래하고 바람을 암송하네
박종빈 시인 / 겨울밤에 쓰는 한 통의 편지
1
모두 잠들고 그대 먼 기억이 눈발로 지워지는 밤, 세상은 창틀 풍경 속에서 조용한 밤입니다 내 방의 불빛은 꺼질 줄 모르고 희디흰 불면은 종이 위에서 더욱 깨끗하여 몸서리 쳐집니다 꽃들의 기억, 비릿한 풀내음, 슬슬 우리의 옆구리를 간지럼 치며 흐르던 시냇물, 이러한 것들을 대숲 아래 몰래 묻어두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애써 외면했던 얼굴들, 추억의 발자국들을 편지 한 장에 담아봅니다 그러다 찢어버리고,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 새파랗게 비명 지르며 나뒹구는 댓잎 몇 개 책갈피에 끼워 넣기도 합니다
2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면 눈발이 되고 눈발이 쌓여 무너지면 사랑이 되는 것을, 도로는 끊어져 있고 그대 얼굴마저 지워지는 폭설의 밤, 일어설 줄 모르는 언어, 일어설 줄 모르는 사물들, 조금씩 살 비비며 서로의 체온으로 잉크를 녹여내는 지금, 어둠은 밤이 될 수 없습니다, 어둠은 이제 밤만의 차지가 아닙니다 내 가슴속 불빛이 더 이상 눈물이 아니듯 새벽은 한발 한발 지상의 불빛을 점령해가기 시작합니다 맨몸으로 일어서는 언어, 눈 위로 잉크처럼 푸르게 번져나가는 그리움, 그래요 기쁨의 몸속엔 항상 슬픔이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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