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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춘희 시인 / 레몬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9.

서춘희 시인 / 레몬수

 

 레몬이니까 레몬 아홉 개쯤 키울 수도 있고 뜯어 먹을 수도 있어 레몬 씨가 박힌 칼을 들고 서서 자신했지만 아무도 꺼내올 수 없었던 레몬이 이렇게 모이니 겁도 났습니다

 

 부패 흔적조차 없는 그 오랜 레몬이 레몬을 벗어나는 동안 여린 살갗은 따갑고 구르는 작은 여름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칼끝을 세우자 레몬이 아예 없었으면 좋았겠다 싶지만 레몬은 당도했고 이제는 눈앞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끈적해진 그것을 한 움큼 집어넣고 있는 힘껏 뚜껑을 닫을 때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기분

 

 시들겠구나, 잠잠해지겠어 그런 생각만 했습니다 손목을 풀며 잔해를 확인하며 다음번엔 레몬보다 큰 것을 조각낼 수도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보폭을 넓혔습니다

 

 그날 밤은 두통 없이 잠이 들었습니다 급정지하는 기차도 뿌리가 뽑힌 듯했고 뭔가를 요구하는 아기와 고양이도 울음을 그쳤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이런 밤이 평화야

 이런 밤이 평화

 

 그러나 레몬은 생각보다 강해서 도마의 가장자리가 푸석푸석해지고 베란다 안쪽으로 바스락거리는 발자국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큼, 큼, 큼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했고 창살을 쥐고 흔드는 괴 발랄함으로 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습니다

 

 움켜쥔 칼의 손잡이도 갈라져 더는 손 쓸 수 없이 파헤쳐진 이런 얘기는 누구와 나누어도 해소되지 않아, 가시 같은 눈을 뜨고 레몬은 차갑게 속삭입니다 레몬과 레몬이 서로의 어두운 얼굴이 되어 그득 차오른 거품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붙들린 나는 서둘러 모래시계를 뒤집고 유리병을 흔들었습니다 그것이 꿈이었는지는 헷갈리지만 그렇게 여러 번 흔들고 모래를 시계를 다시 뒤집고- 따뜻한 컵에 따라 마시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시고 씁쓰름한 달콤으로 이제 끝이라고 말할 입술을

 

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2. 봄호 중에서

 

 


 

 

서춘희 시인 / 극 1980

 

 

이번 극은

극과 극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내가 그린 원으로

비집고 들어와

손도 씻지 않고 잠이 들고요

 

우연이 모래를 의미가 맹물을

삼키고 잡아먹힙니다

 

그렇게 있잖아요 우리

사십 년 후에도

 

잠깐 놓아둘 때조차 소름이 돋아서

 

정확히 보려 하면

정확히 갈라집니다

 

 


 

 

서춘희 시인 / 극 1983

 

 

 동네는 한산하고

 멀리 오토바이가 소리 없이 지나갑니다

 

 당신이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에 몇 자를 적기 전

 무엇에 휩싸였는지 모릅니다

 

 내가 태어난 지 삼 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발등을 문지르는 동안

 빛이 계속되던 실내

 

 자꾸 살아야 할 일을 만들지 마

 나는 문 뒤에서 혼자 말하고

 웃었어요

 

 맨 처음의 독백처럼

 나무가 서 있고

 덩실덩실 무화과가 열리는

 장면

 증명하기까지

 

 다 드러날 수 없는 게

 우리란 걸

 나중에야 알았지요

 

 희희희

 

 다시 눈이 내리고

 집으로 가는 길은 지워졌습니다​

 

2021년 시집 『우리는 우리가 필요해』 중에서

 

 


 

서춘희 시인

1980년 전남 해남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