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남 시인 / 비닐하우스
즐거운 일이다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익숙한 번호 전화벨이 울릴 때 전화가 들려 올 때
연탄보일러 잘 도는 비닐하우스 여린 싹들 오이, 가지, 고추, 대추방울토마토 온돌 위에 촘촘하게 앉아 있는
“모종은 어디로 가셨나” 물어보는 이장님 신품종 대추방울토마토
질펀하게 차려진다. 모종분이 비켜준 자리에 막걸리와 소주, 삼겹살과 고추장에 볶은 하우스에 새참이지 빠지면 섭섭하지
닭발은 매운맛, 이건 무슨 맛 모종을 밀치는, 넘쳐나는 술잔은 우선 배부터 말끔하게 비워지는 국수 접시
택배트럭이 도착한다 모종 포트 50구 세 박스를 던져주고 간다 하우스 안으로 모신 어린것 위로 고운 흙이 풀풀
흙물을 뒤집어써도 좋은 일 얼어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 이 찜통에서 나가야지 땀으로 목욕하기 전에 떨고 선 저 입양아부터 안으로 들어오자 나서는 손수레를 도로 불러들인다
최호남 시인 / 너무 가까워서 먼
강변이라서 그래 강을 따라 걸으면 저녁의 얼굴이 생기고 눈이 생기지 알아 볼 수 있다. 너를 바라보는 저녁의 눈 거기 저녁 강이 너를 바라본다.
길이 앞장서 너를 데려다 준다. 너는 좋아 보여 길이 강을 따라, 강이 길을 따라 걸어간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길이 걸어가
와이셔츠를 지나, 블라우스를 지나, 철수한 초소를 지나 어제보다 좋아 보이는 너 좋은 생각을 하는 것만 같다. 네가 좋아 보일 때 길도 너의 저녁처럼
갈대숲 지나 들어간 찻집 물결소리에 묻어 따라온다 밟힌 잔디가 허리를 펴기 전에 개똥냄새가 주문부터 해 주세요 앉을 자리가 보이지 않는 찻집
자리가 모자라서 그래 한강을 꼴깍 삼킨 해, 너는 아메리카노로 빈자리 지키는 의자 너는 아이스커피 서서 바라본 벽에 구름이 테이블처럼 구름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집과 길 달리는 차들, 틈이 된 사람들 언제 보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그래 너무 멀리 바라봐서 누군가 일찌감치 강을 저녁에다, 저녁을 강에다 너무 많이 흘려서, 그래 잠들어서
최호남 시인 / 세탁소
골목을 골목이 돈다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뭐 먹을 것 있을까 배가 고팠다 더운 날씨에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싶었다 해장국집을 지나 모퉁이의 세탁소 앞으로 걸어간다. 주말에 결혼식에 가야 해 흔들리는 꼬리표들만 보일 뿐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너의 이름이 불리기를, 흔들리기를 안부를 묻고 싶은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너는 오늘도 세탁소 안에 있는 것 같다, 네 이름이 흔들린다 맡겨 논 내 양복처럼 우두커니 나를 기다는 것은 아닐까? 열심히 무언가를 고르고 있다 아주머니의 반팔 소매가
빨갛게 익은 사과를 주고받고 있다 얼마인가요? 삼천 원이에요 저쪽으로 사라진다 검은 모자 빨간 장갑 아주머니가 과일 사세요 목소리가 골목길이 사라진다
햇살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었다 내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등 뒤에 비쳐주는 길 위에 덜거덕거리는 드럼통 본다 다시 세탁소를 향해 걸으며 너의 아파트가 보인다 너의 문을 닫혀있고 문 틈 사이 조금 전 택배 아저씨가 놓고간 전기요금 고지서와 택배상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
최호남 시인 / 가만있다
수행한다. 한 사람씩 수행한다. 우리는 수행해야 하니까 움직여야 하는 수행을 시간 속에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니까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말은 사막이니까 어떤 일이 생길지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가만있는 수행 중이니까 오늘도 우리를 정지 시킨다. 발을 멈춘다. 숨을 멈춘다. 연기를 하리라.
정지는 아름답다. 우리는 보다 더 높은 단계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가만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하는 걸까 다들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하지는 말고
그러나 이곳은 사막이니까. 도대체 이 수행이 왜 수행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사막으로 떠날 거다. 움직이지 않는 사막에서 움직이지 않는 수행을 할 거다.
최호남 시인 / 참새들이 가위질을 한다
찬바람이 쓸어가는 새벽 포장마차도 문을 열지 않는 주차장 저쪽 일찍 잠을 깬 비둘기 몇 마리 얼쩡거린다. 라디오 볼륨을 낮추고 김치라면 국물을 들이켠다 아직 여명, 슈퍼마켓의 천막들이 줄줄이 올라가고 비둘기들이 지붕 위로 자리를 옮긴다.
무엇부터인지 무엇을 쫓아가야하는지 주인만 아는 시간 개수대로 무더기무더기 쌓여 올라가고 가격표가 나붙으면 날이 밝는다
누군가 마주보며 손을 흔든다, 소리친다 시간은 밥, 삶이 눈을 뜬다
시멘트 포장을 비집는 잡초는 벌써 여름이라고 소나기 한 줄기 쏟아달라고 금방 낙엽이 질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봄 몸이 몸을 찾아 허둥대다 생수를 찾는다 또 한 해를 시작하는 봄날, 이미 해가 중천이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당신의 골 깊은 주름에 노을이 내려앉으면 또 하루, 나만의 여유가 웃음으로 에워지는 김포 야시장, 참새가 가위질하던 부리를 접고 검정 비닐봉지 한 장 주차장 구석 쪽으로 날아간다
최호남 시인 / 바람이 말해준다
봄은 흐르고 흐른다 청계천 물줄기 타고 햇볕에 찰방이는 솟아 오른 남산 아래 나지막이 도시와 자연이 어우러진 봄 나를 돌려주지 않는다 기다리던 서풍을 타도 불어오는 불청객
졸음이 내려앉는다 유리창 넘어 따스한 너 동풍이 불고 미세먼지 걷히고
길 뒤덮은 아스팔트, 벽돌사이 피어오른 아지랑이 벚꽃이 입술을 내민다 기다리는 봄을 찾는다
표류를 끝낸 발목을 잡는다 발걸음을 늦춘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언주 시인 / 처음인 양 외 2편 (0) | 2023.04.19 |
---|---|
정성원 시인 / 흰 (0) | 2023.04.19 |
우진용 시인 / 변설 외 2편 (0) | 2023.04.19 |
서춘희 시인 / 레몬수 외 2편 (0) | 2023.04.19 |
장자영 시인 / 즐거운 추리와 검은 눈의 노래 (0) | 2023.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