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성원 시인 / 흰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19.

정성원 시인 / 흰

 

 

 이야기를 풀어볼까 봐요 아주 오래되어 입술에 닿기 전에 바스러질 이야기예요 휘파람을 부는 새가 등장인물일 수 있겠고요 눈동자에 힘을 바싹 당긴 새가 삿대질하며 자신의 영토를 넓힐지 모르겠어요 새는 행인이거나 엑스트라, 아니면 주인공 친구로 설정하겠어요 ‘그리움이 언제 어떻게 나에게로 왔던가’ 이야기 중간중간 이 문장이 끼어들어도 어이없다는 표정은 짓지 말기로 해요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요

 땅에 닿자마자 녹는 눈은 즐거워요

 

 감추어둔 비밀이 이리 녹아 없어진다면

 

 아름답고 참혹한 상상을 하는 동안

 

 몇 번의 겨울이 지나요

 나는 머지않아 새가 될 거예요

 

 얼굴을 붉히며 날개를 뜯었어요 눈은 하얗게 세상을 채웠고 빼곡해진 침묵이 겨울의 심장을 꺼내고 있었죠 나는 나락이 되고 싶었어요 아득한 세상이 되고 싶었어요 나는 나의 손을 잡고 수레에 올랐어요 그리움은 나에게로 오지 못한 채 눈처럼 녹아버렸죠 끝내 대사 한 줄 읊지 못한 새는 행인에 불과했어요 나는 내가 몇 번째 새인지 알지 못했어요 침묵을 쪼개며 펼쳐지는 흰빛, 허공을 떠돌다 스스로 잦아드는 흰빛처럼 나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죠 자신의 영토를 의심하지 않은 곳에서 마음이 자랐어요 그리고 새가 된 나를 보았어요

 

 고개를 들었을 때 흰 새 무리가 허공을 허물고 있었어요

 

계간 <시산맥> 2023년 봄호 발표

 

 


 

정성원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20년《시산맥》으로 등단. 제15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글도리깨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