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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병은 시인 / 사막의 낙타가 우는 법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0.

신병은 시인 / 사막의 낙타가 우는 법

 

오후 네 시쯤이었다

아침에 피었던 나팔꽃은 졌고

주체할 수 없이 마구마구 눈물이 났다

감정이 복받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눈이 쓰리거나 아픈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의사의 값싼 동정심은

나이 들면 생기는 건기라고 했다

몸이 더 빨리 나이 값을 치른다

귀도 그랬고 이도 그랬듯이

또 하나가 단절된 것이다

새들도 날지 않고 나무도 풀도 없이

가문 날 개울물처럼 낡아가는 안구,

물기 없는 길을 가기 위해서

쌍봉에 감춰 둔 물의 기억을 깜박여야 한다

웅웅대는 속 눈썹이 긴 낙타들의

깜깜한 눈물,

아스팔트를 떠도는 대상해열 속

건조한 생태계에 내리는 푸른 신기루였을까

홑이불 걷어낸 오후,

펄펄 눈이 내렸고 물소리 잠방댔다

-시집 『곁』 에서

 

 


 

 

신병은 시인 / 잠깐 조는 사이

 

 

 쉬는 시간에 의자를 제껴 손깍지 머리 위로 기지개를 켜는 그 사이에 잠깐 졸았는가 보다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햇살이 구름이 바람이 이슬이 강물이 다녀갔는가 보다 희어진 머리카락도 눈썹도 내가 잠깐 조는 그 사이에 50년을 건너뛰었나 보다

잠깐 졸다 깬 그 틈새로 참으로 긴 무엇이 휙 하고 스쳐 갔나 보다

 

 그새 그 틈새로 휙 하고

 

 


 

 

신병은 시인 / 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

 

 

 두엄을 져내면 거기 속 썩인 흔적들 환하다

 팽개쳐진 것들의 잃어버린 꿈과 상처 난 말들이 오랫동안 서로의 눈빛을 껴안고 견뎌낸 시간, 맑게 발효된 생의 따뜻한 소리가 있다 곁이 되지 못한 시간의 퇴적 속에서 헐어진 채로 낯선 외출을 준비하는 겨울 묵시록, 아직 할 말이 많은 세상의 행방불명된 말들이 다시 한 번 뜨거워 지기 위한 기다림이라고 염치도 없이 환하게 닿아오는 맑은 생각,

 썩는다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뭔가로 다시 태어나고 픈 것들이 젖은 기억 껴안고 산란한 눈부신 겨울 우화, 맑게 썩어 향기 된 함성들이 하얗게 겨울 들녘의 혈맥을 세운다

 

 꽃이, 노란 봄꽃이 되고 싶다고

 

 


 

 

신병은 시인 / 바닥의 힘

 

 

 용역업체 직원 김씨는 오늘도 허리를 굽혀 바닥을 닦는다 비질을 하고 물걸레질을 하고 반질하게 광택까지 내면 출근길 사람들의 발길까지 밝아온다

  환하게 빛나는 바닥의 힘,

  한때 사장소리 듣던 김씨가 지금은 바닥난 인생이지만,처음 일어설 때도 그랬고 지금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도 바닥 때문이라고,아무리 뼈마디 들쑤셔도 이 모두가 바닥의 힘이란 걸 잘 안다

  바닥이 났다고 바닥이 보인다고 오늘도 김씨는 바닥난 세상의 아침을 닦는다

 

 


 

 

신병은 시인 / 나무와 새

 

 

 국동캠퍼스 강의실 앞에는 히말라야시다 큰 나무 세 그루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는데요 때까치,산비둘기,참새,풀새며 가끔은 동박새 어울려 사는 도시의 밀림 같은 곳이지요 나무들이 하도 우람하고 무성해 여름 큰 바람이 불기 전에 가지치기를 해야한다고들 걱정이 태산 같지만 나는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라고 걱정을 다독여 주었는데요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저 새들이 넌지시 귀뜸해준 연민이지요

 쉽게 무너지고 쓰러질 나무가 아니라고 저 나무의 뿌리는 밤낮으로 건들고 간질이며 함께해온 내밀한 관계,

 오랜 세월 작은 날갯짓으로 다져온 바람의 깊이라고 일러준 것이지요

 

 세상을 견디는 힘은 서로를 다독이는 작은 연민들인 게지요

 서로를 불러주는 작은 힘인 게지요

 

 


 

 

신병은 시인 / 따뜻한 소리

 

 

그대,

햇살이 겨울강을 건너는 소릴 듣는다

쩡쩡쩡 얼어붙은 아침을 깨우는

맑고 투명한 소리의 빛깔을 본다

겉으론 매몰찬 척 날 세운 햇살이

강을 가로질러가는 아픈 소리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피라미들의 차가운 아랫도리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소리다

얼어붙은 것들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려

봄의 언덕으로 닿게 하는 소리의 발길이다

제 속을 따뜻하게 풀어내는 소리다

강 건너 너에게로 보내는 사랑의 전언,

소리가 강을 건넌다

정오가 되어서 더 부지런히 두꺼운 결빙을 깨는

소리의 뿌리마다 봄이 자란다

그대 곁에 있는 따뜻한 소리

 

 


 

 

신병은 시인 / 풍경의 깊이

 

 

1.

버리고 풀어버리고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온,

병실에 누운 새 각시

어머니의 가시 배인 억척 손잔등에

한 생을 지나다닌 바람구멍 숭숭 배인 흔적이 고요하다

지아비의 푸념을 찬물에 씻어 말린 손길도

오남매의 키를 세우기 위해 가난의 밑단을 늘인 흔적

들도 고요하다

 

고요함이 웃는다

어린아이처럼 웃으신다

 

필시 팔순의 세월을 풀어서도 부끄럽지 않은 자리에

누웠기 때문이리라

저렇듯 고요하게 누워

단 하나 허공의 단단함을 껴안은 때문이리라

 

2.

허허허 깔깔깔

노목과 어린 풀꽃이 어울려 논다

깊고 넓고,맑고 밝다

소리의 화음和音이다

 

그 소리들이 숲을 이루고 산의 깊이를 만든다

소리의 화엄華嚴이다

 

 


 

 

신병은 시인 / 선인장과 과꽃

 

 

선인장 곁에 과꽃이 싹을 틔웠고

아프지 않으려 자꾸만 몸을 움추렸다

길나간 걱정을 조용히 되돌리고 되돌려

오늘 아침 조용한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다

선인장은 해준 일이 없다며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곁이 된다는 것이 더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하물며 중심이면서 곁이 된다는 것은,

선인장은 눈치 채지 않게

촘촘한 가시 사이를 넓혀 잎의 길을 내주었으리

서늘한 밤이면 물방울의 작은 외침을 모아

한 방울 아침을 열어주었으리

햇살을 닿게 하려 몸을 비틀었으리

가시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꽃을 피운

과꽃,

보랏빛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곁이 환해진다

 

-시집 <잠깐 조는 사이> 에서

 

 


 

신병은 시인

1955년 경남 창녕 출생, 조선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및 동 대학권 국어국문학과 문학석사. 1989년 《시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바람과 함께 풀잎이』 『꿈의 포장지를 찢어내며』 『강건너 풀의 잠』 『바람 굽는 법』 『잠깐 조는 사이』 『키스』. 시화집 『2+1』. 『휴』가 있음. 한국문인협회여수지부장 및 한국예총여수지회장 외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