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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경 시인 / 죄罪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0.

오세경 시인 / 죄罪

 

 

누가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고 했듯이

나는 죄(罪)만은

죄보다 罪로 쓰고 싶다

그가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답다고 한 것은

책장마다 꽉 들어차 있는

불온한 영혼들의 심중에

한 획을 긋고 싶은

그 절실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죄보다 罪가

더 섬뜩하고 더 죄스럽다

내가 罪라고 쓸 때,

冊 안의 그레고르 잠자와

冊 밖의 나는

저 놀람과 두려움과 슬픔으로

잠시 교통한다

罪,

벌레 같은 그 글자 하나가

내 우주의 경전이다.

 

 


 

 

오세경 시인 / 무력한 처용이 되어

-2인 병실에서

 

 

 “본디 내해다마는 아사날 엇디하릿고”

 

 비극은 처용의 저 어줍잖은 포즈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어 처용의 비장한 춤사위에 역신은 물러서면서도 내심 칼을 갈았겠지 그때 처용이 역신의 목을 단호히 비틀었던들 모든 화근은 사라졌을 것이며 내 신혼의 아내는 온전한 내 몫이었겠지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지극히 소박하였을 터 왜 하필 역신의 내 아리따운 신부의 가슴을 겨냥하였을까 음험한 역신의 욕망에 잘려나간 건 내 신부의 가슴만이 아냐 봉긋하던 생애의 자리마다 저 이지러진 꿈의 잔해들을 봐 머잖아 나의 신부는 이 숨찬 이승의 족쇄를 바수고 영영 역신의 품으로 건너갈 터인데 처용이 되어 처절한 춤사위를 펼칠 수도 역신의 목을 비틀 수도 없는 나는 처용가를 되뇌는 그저 무력한 사내일 뿐이라

 

 “본디 내해다마는 아사날 엇디하릿고”

 

 열두구비 서러운 곡조를 따라나서니 섬섬옥수 신부의 손을 꽉 쥔 채 잠든 사내 하나 있으니 이 시대의 처용이련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손끝으로 희롱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호기롭게 나아가 내 반드시 저 사내를 대신하리 굽이굽이 춤사위로 속수무책의 슬픔들을 펼쳐내면 역신의 손아귀 스르르 풀리고 봉긋하던 신방의 꿈 다시 솟을까 홀연 깨어나는 소리있어 화들짝 눈을 떠보니 서럽던 춤사위는 자취없고 어둠을 깨뜨리는 건 내 어미의 앓는 소리라 그 소리 온 밤을 쥐어뜯어도 병든 자와 돌보는 자의 경계 앞에서 나 또한 무력한 처용이라 애써 역신의 수작을 외면한 채 사내가 그러하듯 그저 어미의 손을 쥔 채 참혹한 밤을 건널 뿐이라 깊고 긴 병실의 여름밤을.

 

 


 

오세경 시인

부산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2008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발톱 다듬는 여자』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