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시인 / 선물
선생님께 드리려고 꺾어온 고운 꽃 받쳐 들고 살펴보니 티가 있어 못 올리고 오늘 아침 이슬 먹은 오랑캐꽃을 떠다가 백자 대접에 소담하게 앉혔더니 반나절을 못 넘기고 머리를 수그리네 구룡산 천의약수터 새벽 물을 길어다 사제의 고마움 담아 올리려 해도 사발 속 물 위에는 내 얼굴에 묻은 땟자국만 보입니다
-시집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에서
이경 시인 / 흑백
화공은 검은 먹으로 흰 꽃을 그리네 국화 한 떨기를 화선지 위에 피워 올렸으나 정작 꽃잎에는 먹물 한 점 묻지 않았네 꽃은 본래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자약 젖은 머리카락이라도 말리듯 목을 젖히고 있네 흰 종이 위에 흰 꽃을 증명하려면 그늘의 깊이를 건드릴수록 환하게 드러나는 꽃 먹은 검은 뼈를 갈아 흰 붓을 씻네
-시집 『열 가지 향기의 시』, 인북스, 2021.
이경 시인 / 뻐꾸기
무엇이 저리 깊고 긴 울음으로 태어났을까 집을 지을 시간이 있으면 한 번 더 울어야 했을까 우는 일에 생을 다 써버리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새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가지에 숨어 울음의 기둥을 세웠을까 울음으로 울음을 밀어 올려 설음의 키가 태산준령의 봄을 넘을 때까지
울음소리가 산을 울리고 하늘을 울려 울음과 울음 사이 한 까마득한 시간을 가두어 대낮이 텅 비어 고요할 때까지 골 속 골 속 찾아다니며 꽃을 피웠을까
꽃을 지우고 산을 지우고 허공을 지워 울음의 집을 지었을까 산과 골짜기와 사람과 마을들이 모두 그 집에 들어가 낮잠이 들도록
-시집 『푸른 독』, 《시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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