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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 시인 / 선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8.

이경 시인 / 선물

 

 

선생님께 드리려고 꺾어온 고운 꽃

받쳐 들고 살펴보니 티가 있어 못 올리고

오늘 아침 이슬 먹은 오랑캐꽃을 떠다가

백자 대접에 소담하게 앉혔더니

반나절을 못 넘기고 머리를 수그리네

구룡산 천의약수터 새벽 물을 길어다

사제의 고마움 담아 올리려 해도

사발 속 물 위에는

내 얼굴에 묻은 땟자국만 보입니다

 

-시집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에서

 

 


 

 

이경 시인 / 흑백

 

 

화공은 검은 먹으로 흰 꽃을 그리네

국화 한 떨기를 화선지 위에 피워 올렸으나

정작 꽃잎에는 먹물 한 점 묻지 않았네

꽃은 본래 거기 있었다는 듯 태연자약

젖은 머리카락이라도 말리듯 목을 젖히고 있네

흰 종이 위에 흰 꽃을 증명하려면

그늘의 깊이를 건드릴수록 환하게 드러나는 꽃

먹은 검은 뼈를 갈아 흰 붓을 씻네

 

-시집 『열 가지 향기의 시』, 인북스, 2021.

 

 


 

 

이경 시인 / 뻐꾸기

 

 

무엇이 저리 깊고 긴 울음으로 태어났을까

집을 지을 시간이 있으면 한 번 더

울어야 했을까 우는 일에 생을 다 써버리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새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가지에 숨어

울음의 기둥을 세웠을까

울음으로 울음을 밀어 올려

설음의 키가 태산준령의 봄을 넘을 때까지

 

울음소리가 산을 울리고 하늘을 울려

울음과 울음 사이 한 까마득한 시간을 가두어

대낮이 텅 비어 고요할 때까지

골 속 골 속 찾아다니며 꽃을 피웠을까

 

꽃을 지우고 산을 지우고 허공을 지워

울음의 집을 지었을까

산과 골짜기와 사람과 마을들이

모두 그 집에 들어가 낮잠이 들도록

 

-시집 『푸른 독』, 《시학》에서

 

 


 

이경 시인

경남 산청에서 출생. (본명 이경희). 1993년 《시와 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시집으로 『소와 뻐국새소리와 엄지발가락』과 『흰소 고삐를 놓아라』, 『푸른 독』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 『야생』 등이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강사. 제5회 유심작품상 수상. 제19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