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권 시인 / 은행나무
사람 안 들기 시작한 방에 낙엽이 수북하다 나는 밥할 줄 모르고,낙엽 한 줌 쥐어주면 햄버그 한 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낙엽 한 닢 잘 말려서 그녀에게 보내면 없는 나에게 시집도 온다는데 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맞나 낙엽 쓸어 담아 은행 가서 낙엽통장 만들어 달라 해야겠다 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 펑 내리겠지 그러니까 젠장 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 밥 사먹어라
박형권 시인 / 우물
귀뚜라미는 나에게 가을밤을 읽어주는데 나는 귀뚜라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언제 한번 귀뚜라미 초대하여 발 뻗고 눕게 하고 귀뚜라미를 찬미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오늘 밤에는 귀뚜라마로 변신하여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동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봐야겠다
박형권 시인 / 우두커니
겨울 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우유 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밭둑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 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길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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