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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일근 시인 / 너를 사랑하기 위해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7.

정일근 시인 / 너를 사랑하기 위해

 

 

때로는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말이듯

때로는 두 눈을 감는 것이 가장 뜨겁게 보는 일이듯

 

너를 사랑하기 위해

혀를 잘라버린다

두 눈을 뽑아버린다

 

한 알 콩잎이 썩어

줄기를 밀어올리고

잎을 달아

콩 꽃 수북수북 일 듯이

 

너를 꽃피우기 위해

나를 땅 속 깊이 묻는다

 

 


 

 

정일근 시인 / 잔

 

 

시인이 앉아 시를 쓰는 밥상 위의 잔

바다로 가득 차 있는 둥근 물 잔

스스로 돌면서 노는 푸른 잔

떠났다가 마감 시간에 다시 돌아오는 잔

밤이면 웅크린 등 위로 별이 떠 반짝이는 잔

시인이 목이 마를 때 단숨에 마셔버리는

궁극의 잔, 그 잔 속 내가 있고

내 잔 속에 그 잔 놓여 있어

시인이 잠들지 못할 때 갈증 가득 차 있는 잔

비우고 나면 시가 그득하게 담겨 있는 빈 잔.

 

 


 

 

정일근 시인 / 사랑, 그 불변

 

 

하늘이 생긴 이후, 단 한 번

같은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다

 

바다가 생긴 이후, 단 한 번

같은 바다를 보여주지 않았다

 

하늘 아래 삼라만상이 그러하다

바다 아래 생명 가진 것도 그러하지만

 

그대에게 보낸 첫 웃음 이후

내가 보낸 웃음은 늘 같다

 

내 심장이 그대를 향해 뛰는 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역시 똑같다.

 

ㅡ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20년 11월호)

 

 


 

정일근 시인

1958년 경남 진해 출생, 경남대 사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 1984년 <실천문학> 5권에 「야학일기 1」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가,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2000년 한국시조작품상을 수상. 2001년 7차 교육과정에 따라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가 수록됨. '시힘' 동인.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 남산> < 첫사랑을 덮다> 등. 경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