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시인 / 대성당
서 있다.
곧 종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손 흔들려고, 미리 끊어둔 표가 있는 것처럼 네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려고……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미꽃처럼 해가 진다. 서 있다.
장미넝쿨처럼 노을이 번져간다.
곧 종소리가 날아올 것이다. 내 몸속에, 뭉쳐져 있는 붉은 가시들이 환하게 켜지면…… 이런고백 핏줄은 바람에 뽑혀 나뒹굴다 외진 웅덩이에 빠져버린 장미넝쿨처럼 몸속에 던져져 있다,어쩌면 종소리처럼,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장미꽃처럼 심장은 박혀있다. 어쩌면 종소리처럼,
서 있을게.
돌아올래? 장미다발을 건네며…… 그건 지구가 둥글어서 너에게 멀어지다 어느새 네 앞에 다시 서는 순간쯤. 시간이 길을 잃어버린 곳에서 그날의 우리는 추억이라는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겠지. 술병을 쓰러뜨리며,
여기는 스무살 같아. 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아, 스무살인 곳에선.
말한다. 종소리보다 크게 그리는 화가는 없는데, 성당 천장에 그려진 장미넝쿨은 좀 달라서 한번 일어났던 일이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일어나고……
어떤 고백은 한 적도 없는데 끝난 적도 없다. 서 있으면
종소리가 날아와 내 몸속에서 나를 건져간다.
신용목 시인 / 밤나무 위에서 잠을자다
오래된 밤나무를 패서 때던 저녁이 있었다
태풍이 핥고 간 밭가에서 바람의 혀를 물고 마르는 데 꼬박 일년이 걸렸다
두발 지게에 실려 밤나무가 나뭇간을 덮던 날
그 저녁 네칸집은 삼백일장 나무의 상여였다 취한 별들이 지붕에 문상객처럼 둘러앉았다
캄캄한 방고래를 지나며 나무는 제 둥치의 모양을 마지막 연기로 그려보고 있었다
밥물이 밤꽃처럼 흘러넘치는 저녁이 있었다
신용목 시인 / 후레시
동그라미는 왼쪽으로 태어납니까 오른쪽으로 태어납니까
왼쪽으로 태어난 동그라미의 고향은 오른쪽입니까 어디서부터 오른쪽은 시작됩니까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는 동그라미의 부모입니까 내가 그린 동그라미는 몇 개 입니까
나는 그들에게 죄인입니까
왼쪽으로 걸어갔는데 왜 오른쪽에 도착합니까 왜 자꾸 동그라미를 그립니까 동그랗습니까
동그랗습니까
어둠을 뒤쫓던 후레시 불빛이 내 얼굴에 쏟아졌을 때 나는 유일한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착취당하지 너는 여자였고 나는 가난했어 무엇보다도 우린 젊어서
온통 늙어가지
그러나 어둠은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후레시를 켤 때마다 보란 듯이 불빛 그 바깥에 가 있었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나는 간신히 외치기 시작했어 비 내리는 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슬픔이 젊기 때문이다
다음날부터 태양은 구정물 통에 담긴 접시처럼 유일한 하늘에 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깨뜨릴 수 있는 동그라미와 깨뜨릴 수 없는 동그라미에 대해 생각했지만 우리가 만났던 밤은 아직 젊었고
어떤 비도 슬픔을 씻기진 못하고
너는 여자였고 나는 가난했지
동그라미 안으로 쓰윽 들어온 손이 내 턱을 치켜올렸을 때 내 얼굴은 이미 깨져 있었다
신용목 시인 /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
목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공중에도 골짜기가 있어서, 눈이 내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하얗게 사라지고 싶었지 눈은 쌓여서 한 나흘쯤, 그리고 흘러간다 목소리처럼, 그곳에도 공터가 있어서 털모자를 쓰고 꼭 한사람이 지날 만큼 비질을 하겠지 하얗게 목소리가 쌓이면, 마주 오면 겨우 비켜서며 웃어 보일 수 있을 만큼 쓸고 서로 목소리를 뭉쳐 던지며 차가워, 아파도 좋겠다 목소리를 굴려 사람을 만들면, 그는 따뜻할까 차가울까 그러나 사라지겠지 목소리 사이를 걷는다고 믿을 때 이미 목소리는 없고, 서로 비켜서고 있다고 믿을 때 빙긋, 웃어 보인다고 믿을 때 모자에서 속절없이 빠져버린 털처럼 아득히 흩날리며 비질이 공중을 쓸고 간다 목소리를 굴려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을 때... 주저앉고 말겠지 두리번거리며 눈사람처럼 제발 울지는 말자, 네 눈물이 시간을 흘러가게 만든다 두 갈래로 만든다 뺨으로 만든다 네 말이 차가워서 아팠던 날이 좋았네 봄이 오고 목소리처럼, 사라지고 싶었지 계절의 골짜기마다 따뜻한 노래는 있고, 노래가 노래하는 사람을 지우려고 하얗게 태우는 목소리처럼, 한 나흘쯤 머물다 고요로부터 고요에까지 공중의 텅 빈 골짜기를 잠깐 날리던 눈발처럼 아침 공터에서 먼저 녹은 자신의 몸속으로 서서히 익사하는 눈사람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었지 그러나 그건 참 멀다, 고개 들면 당인리발전소 커다란 굴뚝 위로 솟아올라 그대로 멈춰버린 수증기처럼 목소리가 사라진 노래처럼
신용목 시인 / 수요일의 주인 신은 화요일에 하늘을 만들었다. 자신의 집을 텅 빈 허공에 띄워놓고 캄캄한 우주, 지구라는 고리에 인간을 거울로 걸어놓았다. 그가 자신을 비출 때마다 신의 슬픔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우리가 보인다. 수요일에 바다를 만들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토요일. 금요일을 지나 목요일을 거슬러 우리는 바다에 왔다. 거기 비친 신의 작업실을 엿보기 위하여 수평선은 우리가 놓은 사다리의 첫번째 칸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뒷모습으로 앉아 서로를 향해 긴 못을 박아 그 사이 수평선을 가로질렀지. 밀물이 그 한 칸을 들어올리고 우리는 다음 칸을 놓기 위해 일어섰는데. 몸으로는 모자란 높이가 있어서 서로에게 박혀 있던 못이 빠지고, 수평선이 물 아래로 떨어지고 그때 우리는 연인이 아니라 연인의 초상화 같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비명을 지르고 있을 평온한 뒷모습으로 바다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저 색을 만들기 위해 신은 바다가 필요했다. 거기 비친 하늘이 너무 맑았다. 짐승의 배를 가르고 꺼내놓은 순한 색처럼 고래가 온다고 했다. 목요일을 지나고 금요일을 넘어서 마침내 다다른 해변의 일요일이 헤엄치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시인은 인생을 쓰기 위해 늙어갔고 유령을 알기 위해 죽어갔어. 그리고 슬픔을 보기 위해 고래를 찾아갔지. 그것은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간 이야기. 고래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슬픔은 신이 자신을 그리다 망친 그림이었다. 화요일을 월요일로 만들기 위해 수요일의 바다를 찢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물 밖에서만 숨쉴 수 있는 고래는 물 안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래는 우리 사이에서 뽑혀나간 못 자국을 두 눈으로 뜨고, 한 칸의 부러진 사다리처럼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물에 젖은 종이와 물에 풀린 물감과 마침내 물에 불은 자화상이 가라앉는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잊었지. 신을 예배당 첨탑에 가두고 쉬는 날에만 깨워서 일을 시켰어. 그리고 기도라는 언어를 발명했지. 그것은 토요일의 시인이 일요일에 신이 된 이야기. 서로를 보자 나는 알아버렸네. 사랑을 만들기 위해 신은 인간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늘 이별이 부족해서 여전히 자신의 전능이 인간의 슬픔인 줄 몰랐다. 사랑 안에서만 믿을 수 있는 우리는 사랑 밖에서는 믿을 수 없는 우리는 수요일에 끝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썰물을 등지고 돌아섰다. 비명을 기도속에 남기고 인간에게는 늘 기적이 부족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이 슬픔의 종교란 걸 알았다. 사랑해.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같은 목소리가 재생된다. 세상의 모든 전화기는 전염병을 앓고 있고 지금 그것은 우리 손안에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 2023년 여름호 발표
신용목 시인 / 고요
수평선이 오선지의 몇 번째 칸인지 알지 못해서 태양을 어떤 음계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다가가면, 촘촘한 계단으로 멀어지다 어느 순간 낭떠러지를 보여주는
저 마디에서 밤은 목소리를 잃었을 것이다. 날마다 다른 박자로 밀려오는 파도,
어촌에 뜨는 별은 물속에서 건져 올린 악기이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악단이다. 밀물을 커튼으로 밀며, 달빛은 젖은 악보를 그림자로 흘려보낸다.
어부는 제 인생을 가사로 쓴다.
신용목 시인 /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꿈에서 오랜 형의 집에 찾아갔는데, 형은 진즉 떠나 없다 말하는 노모 뒤에서 연신 고개를 흔들며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이 꼭 저녁 같아서, 노을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모는 문을 닫지도 않고 수돗가에 내려서서 물을 떠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대로 내게 건넸다. 바가지 붉은 속 같은 노을 속에 여름 해가 고향집처럼 담겨 있었다.
잠을 깬 나는 오랜 형의 번호를 찾아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앉아 물을 세 번 내렸다. 화장실에는 창문 대신 거울이 열려 있었고 전등이 환하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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