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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현 시인 / 수집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19.

박성현 시인 / 수집가

 

 

 문은 촛불을 끈다. 촛농이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의 모래 가득한 짚신에 떨어지기 전이다. 화첩의 은유는 고집스럽다. 문의 가죽장갑은 영하의 입김 속에서도 그 사실을 기억한다.

 

 무소의 뿔이 발톱을 찢는 소리가 목록에서 새어나온다. 수타니파타를 감싼 붉은 양피(羊皮)에 혓바닥을 댔을 때, 수많은 탁류가 국경을 가로질렀다. 도서관 지하창고에

 

 유리들이 벌레 먹은 책장처럼 포개져 있다. 문은 한 손으로 유리 부스러기를 만지다가 서지에 누락된 책의 이름을 기록한다. 기호의 미로를 따라 문은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잘라냈다.

 

 붉은 얼룩이 철자와 철자 사이를 흘러 다닌다. 도서관 지하창고에는 수많은 초판본들이 방치되어 있고, 문만이 그 달작지근한 종이뭉치를 씹을 수 있는 것.

 

 문의 도해는 식은땀을 흘렸다. 잔뼈에도 오카리나 같은 구멍이 뚫린다. 풍향을 감지하던 책의 감각이 먼지가 수북한 마호가니 책상에 닿는다. 문의 손등에 얽혀 있는 문자들이 바싹 마르기 시작한다.

 

 


 

 

박성현 시인 / 민들레국수집

 

 

내가 본 민들레국수집은 잘 여문 배추처럼 속이 훤했습니다. 식당이기는 한데 식사시간을 재촉하지 않고, 밥값도 공짜라네요. 어떤 손님들에게서 지린내가 나기도 했지만 낡은 가게는 크고 헐렁한 안주머니처럼 넉넉했습니다.

 

식당주인은 쉰 살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25년을 수사로 생활했다지만 세상으로 나온 일을 좀체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그의 이름이었던 베드로,

그 수줍은 단어처럼 여전히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이니

 

민들레국수집은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며

그 따뜻한 손으로 닳고 닳을 수밖에 없는 무량수전이겠지요.

 

사람의 인연은 모질고도 즐겁습니다. 수사 생활을 접었다는 소식은 청송교도소를 나온 출소자에게도 전해졌는데, 그들의 가난한 눈을 보고 베드로는 자기의 살을 떼어 그들에게 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메마른 곳일수록 더 많은 꽃씨를 날리는 민들레, 아프고 외롭기만 하다면 뼈와 뼈가 부딪치는 것처럼 소란스럽기만 하겠지요. 차갑고 무거운 것이, 말하자면 긴 울음 같은 것이 손톱마다 맺혀야 비로소 씨앗들도 공중에서 내려와 한 채의 집을 짓는 것이겠지요.

 

 


 

 

박성현 시인 / 하염없이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하염이란 말이 궁금해졌다.

가로등 아래 내려 쌓이는 불빛도 하염없는데

그 말은 어디서 왔을까

 

당신 곁에서 하염없이 울다가

우리는 왜 하염을 버려둔 채로 울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하염은 모래처럼 비좁고 분명한데

스며들 때마다 차갑고 서러운데

 

하염없이 울다가

칼바람이 모여드는 성난 골목과

높은 파도를 생각했다

 

나의 안식이란

하염없이 쏟아지는 부끄러움과 욕설뿐

바람이 짊어진 구름의 무게는

왜 한없이 투명한 걸까

 

왜 당신은 밤낮없이 눈을 감고 있었을까

하루에 두 번

 

간이역에서 정차하는 낡은 버스처럼

하염없이 툴툴거렸다

그래서 하염이 궁금했다

 

 


 

 

박성현 시인 / 울음을 데워

-6월 이야기 · 7

 울음을 데워 술을 빚었습니다 향이 짙어 멀리까지 달아올랐습니다 술 담을 그릇이 없어 뼈를 잘라 가루를 내었습니다 달빛을 이겨 만들었으니 잔으로 삼기에 적당했습니다 단숨에 마시고 내주었습니다 잔이 돌아올 때마다 파도가 부서졌습니다 잔이 돌아올 때마다 밤과 낮이 부서졌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면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언제나 나는 갈 수 없는 나라, 당신의 하나뿐인 천국이었습니다

 

 


 

 

박성현 시인 / 액자

 

 

 액자는 붉다.

 사진은 파랗고 입술은 노랗다.

 색깔들이 각각의 골목에서

 

 각각의 어둠을 비집고 걸어 나온다.

 몇 개의 수직은

 액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 (서두르세요, 문을 닫아야 합니다)

 

 오후 세 시 극장, 말들이 대본을 뒤적거리거나 액자 뒤에 숨어 담배를 핀다. 낡은 의자에는 우산과 달착지근한 잉크가 앉아 있다. 그들은 용접공이거나 의사, 늦은 밤의 아가씨가 되기도 한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므로,

 우체국은 등장하지 않는다.

 

 의자는 발랄하며, 플라스틱 오렌지는 앙상하다. 벽은 물렁물렁하고 창문은 후각에만 집중한다. 아가미를 힘껏 벌리며 말의 왼쪽이 웃는다. 다른 쪽은 어둡다.

 

기 (문을 닫아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대본을 씹으면서,

 말은 액자의 모서리로 걸어간다.

 

 말의 아가미는 붉다.

 혼자 우두커니 붉다.

 

 


 

 

박성현 시인 / 집쥐에 관한 농담

 

 

 살구죽

 겹겹이 엉켜 붙어 짓물러버린 미련한 날씨였다. 오줌을 누면 누런 생강 냄새가 났다. 통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껍고 마른 부스럼이 생겼다. 통증에게 지불한 값이었다. 아침부터 살구죽을 끓이는 할머니는 잠시라도 부엌을 뜨지 못했다. 나는 재봉틀 밑에 웅크려 앉아 재미삼아 실을 풀었다. 재미는 없고 도통 어지럽기만 할 뿐이었다. 목이 잘린 집쥐들이 벽을 타고 기어 올랐다. 잠깐이지만 지독한 꿈이었다. 허기진 신발만 몇 켤레 뒤죽박죽. 생강 냄새가 나는 마당의 구정물은 조금씩 길을 내며 흐르다가 시궁 어디쯤에서 합쳐지겠지. 내심 하수구 속에라도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나는 쥐가 아니어서 불가능했다.

 

 흉터

 쥐가 파먹은 듯했다. 긴 앞니로 손등을 꽉 물어버린 생김새였다. 아파도 천 번은 아팠어야 했는데 도무지 통증이 다녀간 기억은 없었다. 저녁은 늘 바쁘게 왔고 밥상머리에서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입이 있지만 묵묵히 숟가락만 들락거렸다. 밥을 삼키면서 새끼를 물어 죽인 어미를 생각했다. 사람 손이 탄 것들은 병신으로 자랄 거라 수군댔다. 짐승이 아닌 까닭에 그 마음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을 닫았을 때는 이미 목숨도 끊어졌을 것이다. 개는 며칠 째 마루 밑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처마 어디쯤 묵은 쌀 씹는 소리가 났다. 말벌들이 금간 서까래에 집을 짓느라 소란한 것이다.

 

 얼룩들

 똥지게꾼이 다녀갔다. 할머니는 잠결에도 냄새를 맡으시고 숭늉 두 사발이라도 챙기라 하셨다. 뒷간에서 문 앞까지, 문에서 마당 너머 가파른 계단까지 일정한 보폭으로 똥물이 떨어졌다. 개들은 징검다리 건너듯 출렁거리며 뛰어다녔다. 마루 밑에 숨어 있던 집쥐들이 부엌으로 돌아갔다. 큰 놈 뒤에 작은 놈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어디선가 살구죽 끓는 냄새가 났다. 천식이라도 앓는 모양이었다. 소나기가 퍼붓겠다고 생각했지만, 얼룩이 마르면서 느릿느릿 땅 밑으로 스며들었다.

 

 


 

 

박성현 시인 / 그 언덕의 밤

 

 

그 언덕은 밤이었고

식어버린 달이 떠 있었다 아직 밤이 아닌

남자의 입술에는

붉은 기와 무늬의 저녁놀이 흘러내렸다.

 

그 언덕의 밤에는

벽과 나무와 구름이 없어서 남자는

허리를 세운 채

낮고 무거운 서쪽에 기댔다.

 

그 언덕의 밤에서

올빼미가

울었다 올빼미는 날개를 단단히 잠그고

회색 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 언덕의 밤으로

 

소년들이 걸어왔다.

모두 챙이 넓은 모자를 썼고

맨 끝에서 느릿느릿 올라오는 소년은

지팡이를 집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에 묻은

낮의

기묘한 어둠, 남자가 기댄 서쪽을

한 소년이

주머니칼로 잘라냈다.

 

그 언덕의 밤은

남자가 사라진 곳 소년들이 이미

남자의 사지를 둘러메고

들판으로 향했다.

 

-계간 『미네르바』 2023년 겨울호 발표

 

 


 

박성현 시인

1970년 서울 출생.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문학박사). 2009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2013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8년 세종도서 교양부분 선정. 2020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서울교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