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시인 / 빨래 - 각색, 람보 Ι
늙은 '람보'가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 후, 또 어느 해 오랜만에 베트남의 한 옛 전우를 찾아갔다. 목숨을 걸고 함께 밀림을 누비던 곰 같은 덩치, 그는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하얗게 잘 마른 목수건 한 장을 걷어 공중에다 대고 훨훨 털면서 파파노인이 된 친구의 아내가 말했다. "이렇게, 가볍게 떠났지요, 뭐...... ." 그러나 람보도 들어올리지 못하는 침묵, 돌아서는 마음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문인수 시인 / 만금의 낭자한 발자국들
개펄을 걸어 나오는 여자들의 동작이 몹시 지쳐 있다. 한 짐씩 조개를 캔 대신 아예 입을 모두 묻어버린 것일까, 말이 없다. 소형 트럭 두 대가 여자들과 여자들의 등짐을, 개펄의 가장 무거운 부위를 싣고 사라졌다. 트럭 두 대가 꽉꽉 채워 싣고 갔지만 뻘에 바닥을 삐댄 발자국들, 그 穴들 그대로 남아 낭자하다. 생활에 대해 앞앞이 키조개처럼 달라붙은 험구, 함구다. 깜깜하게 오므린 저 여자들의 깊은 하복부다 -시집 <적막 소리> 2012
문인수 시인 / 함박도
경상남도 통영시 미륵도에 딸린 작은 섬. 현재, 열여섯가구에 60대 이상 주민 스무남은명이 산다.
사람의 바다엔 저렇듯 섬이 있고,
섬이 있어 바다가 아름답다.
목에, 동뫼, 우무실, 굼터, 골에, 독발에, 섯바들, 아랫몰, 후력개, 맨주름, 진살에, 나지막, 밭등, 차암박, 함박끝.......
노인들은 오늘도 이 섬을 이루는 곳, 곳, 저 여러 이름들을 푸른 함지박 모양으로 한데 모아, 그 바다에 다독다독 잘 심어두는 것이다.
문인수 시인 / 죽도시장 비린내
이곳은 참 복잡하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낯설다.
포항 죽도공동어시장 고기들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아직 싱싱하다. 붉은 고무 다라이에 들어 우왕좌왕 설치는 놈들은 활어라 부르고, 좌판 위에 차곡차곡 진열된 놈들은 생선이라 부르고.........
죽도시장엔 사람 반, 고기 반으로 붐빈다. '어류'와 '인류'가 한데 몰려 쉴 새 없이 소란소란 바쁜데, 후각을 자극하는 이 파장이 참 좋다.
사람들도 그 누구나 죽은 이들을 닮았으리.
아무튼 나는 죽도시장에만 오면 마음이 놓인다. 이것저것 속상할 틈도 없이 나도 금세 왁자지껄 섞인다.
여긴 비린내 아닌 시간이 없어, 그것이 참 깨끗하다.
문인수 시인 / 과메기
겨울 한철 반쯤 말린 꽁치를 아시는지. 덕장 해풍 아래,그 등 푸른 파도 소리 위에 밤/낮 없이 빽빽하게 널어놓고 얼렸다 풀렸다 얼렸다 풀렸다 한 것이니 그래, 익힌 것도 날것도 아니지,다만 고단백의 참 찰진 맛에 아무래도 먼 봄 비린내가 살짝 비치나니,
저 해와 달의 요리,이것이 과메기다.친구여, 또 한 잔! 이 우정 또한 천혜의 사철 술안주라지.
문인수 시인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훨씬 못미쳐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을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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