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복효근 시인 / 어머니의 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6. 22.

복효근 시인 / 어머니의 힘

 

 

어머니 비가 억수로 내려요

냅둬라

 

냅뒀다

비가 그쳤다

 

-시집 『꽃 아닌 것 없다』 천년의시작,  2017.

 

 


 

 

복효근 시인 / 눈물 찬讚

 

 

1.

눈물이 별이 된다는 것을 꼭 믿진 않지만

눈물이 굳어 돌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눈물이 별이 되지 않는다고

굳이 믿지 않을 이유는 없지

 

2.

어떤 별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것도 있단다

다이아몬드 별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내 몸이 흙으로 빚어진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니 울어라

 

3.

울면서 태어나고 울면서 살다가 울면서 죽어도

이 별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도 없다

 

눈물 뒤에서 꽃은 피고 별은 태어난다

 

 


 

 

복효근 시인 / 예를 들어 무당거미

 

 

무당이라니오

당치 않습니다

한 치 앞이 허공인데 뉘 운명을 내다보고 수리하겠습니까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겁니다

보이는 것도 다가 아니고요

 

보이지 않는 것에 다들 걸려 넘어지는 걸 보면

분명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덕분에 먹고 삽니다

 

뉘 목숨줄을 끊어다가 겨우 내 밥줄을 이어갑니다*

내가 잡아먹은 것들에 대한 조문의 방식으로 식단은 늘 전투식량처럼 간소합니다

 

용서를 해도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작두라도 탈까요

 

겨우 줄타기나 합니다

하루살이 한 마리에도 똥줄이 탑니다

 

무당이라니오

하긴 예수도 예수이고 싶었을까요

 

신당도 없이 바람 막아줄 집도 정당도 없이

말장난 같은 이름에 갇힌 풍찬노숙의 생

 

무당 맞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신휘 시인의 「실직」의 한 구절 변용함.

 

 


 

 

복효근 시인 / 하현下弦

 

 

저 하늘에도 풍랑이 거센가 보다

쪽배 한 척 위태롭게 기울었다

 

그쪽에서 보면 이쪽이 더 위태로워서

조난신호마저 보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실눈 겨우 뜨고

이 난파선의 침몰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복효근 시인 /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맨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시인 / 진화의 척도

 

 

폭설이 내려

울타리 밑에서 낟알을 찾는 참새 몇 마리

배고픈 길고양이 그걸 잡아보겠다고

웅크렸다가 튀어나가는데

보란 듯이 포르릉 참새는 날아가버린다

어느 쪽이 진화가 앞선 것일까

누가 더 불쌍한 것일까

먹고 살겠다고

날개 대신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고양이와

송곳니도 발톱도 포기하고 날개를 택한 새가 있다

송곳니도 없어서 날 선 발톱도 없어서

그렇다고 날개도 없어서

어떻게 하면 동종 아닌 것과 동종까지를 둘러먹을까

잔머리만 잔뜩 발달한 종도 있다는데

더 먹고 더 가지기 위해서

날개 대신 미사일을 만들어 쏘고

단추만 누르면 지구가 여러 번 멸망할 핵무기를 만든 종도 있다는데

길고양이는 굶을지라도 활을 만들지 않는다

참새는 굶을지라도 남의 곳간을 헐지 않는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진화가 그 긴 여정에서 자연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새와 고양이와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어느 쪽이 앞선 것일까

불쌍한 것은 어느 쪽일까

 

 


 

 

복효근 시인 / 그 사이 별이 뜨고

 

 

오후가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서녘 하늘엔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꽃핀 쑥부쟁이 몇 포기를 피해 예초기가 에둘러 지나간 자리

산책길엔 고라니 똥 한 무더기

 

우린 그렇게 길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구나

고라니도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았겠다

 

매에 쫓기던 새들도

지금쯤 둥지에 들었을 것이다

 

길 복판으로 기어드는 지렁이를 풀밭에 던져주었다

 

세상은 늘 조간신문 정치면 같아도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저녁은 있다

 

 


 

복효근(卜孝根) 시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1년 계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등이 있음.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2015. 제2회 신석정문학상. 대강중학교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