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시인 / 어머니의 힘
어머니 비가 억수로 내려요 냅둬라
냅뒀다 비가 그쳤다
-시집 『꽃 아닌 것 없다』 천년의시작, 2017.
복효근 시인 / 눈물 찬讚
1. 눈물이 별이 된다는 것을 꼭 믿진 않지만 눈물이 굳어 돌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눈물이 별이 되지 않는다고 굳이 믿지 않을 이유는 없지
2. 어떤 별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것도 있단다 다이아몬드 별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
내 몸이 흙으로 빚어진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니 울어라
3. 울면서 태어나고 울면서 살다가 울면서 죽어도 이 별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도 없다
눈물 뒤에서 꽃은 피고 별은 태어난다
복효근 시인 / 예를 들어 무당거미
무당이라니오 당치 않습니다 한 치 앞이 허공인데 뉘 운명을 내다보고 수리하겠습니까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겁니다 보이는 것도 다가 아니고요
보이지 않는 것에 다들 걸려 넘어지는 걸 보면 분명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덕분에 먹고 삽니다
뉘 목숨줄을 끊어다가 겨우 내 밥줄을 이어갑니다* 내가 잡아먹은 것들에 대한 조문의 방식으로 식단은 늘 전투식량처럼 간소합니다
용서를 해도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작두라도 탈까요
겨우 줄타기나 합니다 하루살이 한 마리에도 똥줄이 탑니다
무당이라니오 하긴 예수도 예수이고 싶었을까요
신당도 없이 바람 막아줄 집도 정당도 없이 말장난 같은 이름에 갇힌 풍찬노숙의 생
무당 맞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신휘 시인의 「실직」의 한 구절 변용함.
복효근 시인 / 하현下弦
저 하늘에도 풍랑이 거센가 보다 쪽배 한 척 위태롭게 기울었다
그쪽에서 보면 이쪽이 더 위태로워서 조난신호마저 보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실눈 겨우 뜨고 이 난파선의 침몰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복효근 시인 /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맨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시인 / 진화의 척도
폭설이 내려 울타리 밑에서 낟알을 찾는 참새 몇 마리 배고픈 길고양이 그걸 잡아보겠다고 웅크렸다가 튀어나가는데 보란 듯이 포르릉 참새는 날아가버린다 어느 쪽이 진화가 앞선 것일까 누가 더 불쌍한 것일까 먹고 살겠다고 날개 대신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을 가진 고양이와 송곳니도 발톱도 포기하고 날개를 택한 새가 있다 송곳니도 없어서 날 선 발톱도 없어서 그렇다고 날개도 없어서 어떻게 하면 동종 아닌 것과 동종까지를 둘러먹을까 잔머리만 잔뜩 발달한 종도 있다는데 더 먹고 더 가지기 위해서 날개 대신 미사일을 만들어 쏘고 단추만 누르면 지구가 여러 번 멸망할 핵무기를 만든 종도 있다는데 길고양이는 굶을지라도 활을 만들지 않는다 참새는 굶을지라도 남의 곳간을 헐지 않는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진화가 그 긴 여정에서 자연 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새와 고양이와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어느 쪽이 앞선 것일까 불쌍한 것은 어느 쪽일까
복효근 시인 / 그 사이 별이 뜨고
오후가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서녘 하늘엔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꽃핀 쑥부쟁이 몇 포기를 피해 예초기가 에둘러 지나간 자리 산책길엔 고라니 똥 한 무더기
우린 그렇게 길을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구나 고라니도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았겠다
매에 쫓기던 새들도 지금쯤 둥지에 들었을 것이다
길 복판으로 기어드는 지렁이를 풀밭에 던져주었다
세상은 늘 조간신문 정치면 같아도
누군가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저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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