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자 시인 / 청운사 연꽃
빗방울은 연잎위에 구슬 되어 구르고
순백의 속살 두어 봉오리 벌어 어룽어룽 돋은 이야기 시인님 가슴에 씨방으로 내리고
텃세들 지줄 거리는 소리 바람에 실린 향기네
절집 뜰엔 시인님 시어들 빙빙 돌아 앉아 연꽃으로 피어나네.
박승자 시인 / 목련철
맛있는 것을 아껴 먹은 버릇이 있어 불 켜진 백열등 같은 환한 봄을, 조금씩 뜯어 먹네 움푹 뒤꿈치가 파인 신발 위에 또 신발이 겹쳐지네 고만고만한 신발 중에도 유독 작은 문수 한 짝을 집어 들며 가볍다, 보드랍다 전족을 한 버선발처럼 밤눈이 내린 마당 찬장 쌀밥에 난 생쥐 발자국처럼 달빛도 환한 백열등처럼 희디희기도 해라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맨발은 꽁꽁 언 찬밥 덩어리 눈 내리는 창을 항상 바라보고 계셨지 왜 북쪽으로 창을 내셨어요 웅얼웅얼 잠꼬대처럼 어린 나는 夢問을 한다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둘둘 말며 그녀의 夢遊를 애써 외면하면 북쪽으로 간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란다 라는 답을 듣는다 한바탕, 창틀이 흔들리고 싸락싸락 희디흰 소리 마루 끝에 엎어져 있던 하얀 고무신 위로 눈나비를 한 송이, 한 송이 날려 보내며 난 맛있는 것을 아껴 먹은 버릇이 있어 얼음 조각을 입에 물고 고무신 위의 나비잠을, 북쪽 창을, 폭설이거나 광폭한 바람을 목련철, 나의 생 동안 조금씩 뜯어 먹었다네
-계간 《시산맥> 2019년 겨울호
박승자 시인 / 그 저녁, 해안가 낡은 주점
그 저녁, 그 술자리가 꺼지지 않는 촛불 될 수 있을까 수목이 빽빽한 내일의 숲이 될 수 있을까 일행들은 취해서 술잔이 엎어지고 웃음이 낮은 천장에 박쥐처럼 매달린
밀물이 밀려든 해안가 낡은 주점 소란을 즐겁게, 팽팽하게 감당해내던 서로의 얼굴을 비추던 앙금이 가라앉는 탁주 마주 앉은 자리, 이 자리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는 긴 이별의 숲으로 당나귀를 끌고 가겠지, 아무도 당나귀 방울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가끔 그 해안가를 걸쳐온 바람이 귓불을 얼리겠지 별은 더 고요하고 적막하겠지 지상의 시간으로 흐르는 별의 맥박을 짚으며 이미 정령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한없이 쓸쓸한 사랑을 정령의 치마폭에 눈물과 함께 쏟아낼 것이다
당나귀가 숲을 나가자고 방울소리 높여도 마음은 방울소리를 애써 외면하겠지 하현달은 그리움의 머리카락을 한없이 쓸어 주겠지 사랑, 쓸쓸한 당신
-시 전문지 <유심> 2015.02(vol.82)에서
박승자 시인 / 어떤 울음
저녁 무렵, 문화예술회관 산책길 계단에서 울음이 잘 마블링 된 육질처럼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어미였거나 누군가의 아내였을
혼자 오랫동안 꼭꼭 여미고 발효 시켰을 슬픔이 노을 속으로 스며들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다 흰 낮달 가녘을 밟듯 조심스럽게 울음 끝을 돌아갔다 나도 몇 개의 울음을 움켜쥔 주먹 속에 가둬 둔 적이 있었다
왠지 그녀가 그어 놓은 가녘에 내 오래된 각오를 풀어 놓듯 내 주먹을 슬며시 펼쳐보았다. 달팽이촉수처럼 길게 손을 내밀어 다독이거나 내 작은 어깨 한쪽이라도 빌려 주고 싶었다 그 울음이 마치 내 안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첩첩한 울음이 먹구름 사이사이에 박힌 노을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박승자 시인 / 작고 오래된 가게
입 안 가득 사탕이 녹지 않고 있었다
격자문에 유리로 된 엽서만한 창 눈을 바짝 대며 탁자 옆, 물건을 가져간 사람이 기록하는 외상장부가 건들건들 검은 고무줄에 묶여 있었다 엄마 콩나물죽도 맛있어요 까만 밤 같은 간장으로 질퍽한 하얀 날을 쓱쓱 비벼 먹으며 거뜬히 술래잡기도 깡통차기도 할 수 있는 걸요
속눈썹처럼 휘어지는 강을 안고 잠들어 있는 엄마를 폴짝 넘어 괘종시계 소리를 따라 들어가며 잡목림은 숨바꼭질하기 좋은 곳 가지가 맨살에 스쳐 상처투성이여도 괘종시계 안은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자주 술래여서 동무들은 헐거운 나무문 안쪽에 연탄광에 꽁꽁 숨어 있어요
밤, 강이 얼며 선반 위 사이다병 터지는 소리가 폭죽 소리처럼 들려요
민물새우가 되었다 붕어가 되었다 하는 겨울달이 보내 준 엽서만한 유리창이 눈썹 위에 올려 있어 무거운 눈을 자주 비벼요
몇 개의 이가 썩어도 사탕은 입 안에 가득해서 야야, 극장 끝났냐 하는 소리가 뒷골목 건달 같은 외상장부를 툭 건드리고 함석문 닫는 소리 점빵 노란달 스위치를 내리고 그래도 그때 먹는 콩나물 멀건 죽이 얼마나 맛있는지 지금도 입 안 가득
하얗고 둥근 십 리 사탕이 녹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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