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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상웅 시인 / 각목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7. 15.

백상웅 시인 / 각목

 

 

광목으로 옷을 만들어 시집을 왔다는

어머니의 말, 각목으로 알아듣고는

나는 옹이가 빠져 구멍이 난 저고리를

생각했다, 그땐 각목이 귀했을지도 몰라

옆집 창고에서 빌려왔을지도 몰라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나무 속을 기어다니는

딱딱하고 팍팍한 누에 한 마리를 떠올렸다

각목을 광목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도

나는 누에가 각목 속에 터널을 뚫는다고

믿었다, 다리 부러진 의자가 되면서도

젖은 밭이랑에 박혀 서서히 삭아가면서도

때리는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널따란 천을 짜고 싶어할 각목을 떠올렸다

어머니 같으면서도 때론 아버지 같은

각목에 녹슨 못을 박아 바지랑대를 만든다

물레를 돌리다가 두꺼운 주름을 쿵쿵 접을

누에, 각목을 길게 뻗어 빨랫줄을 치켜올렸다

지금 각목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싶은 것일까

말라서 주름진, 이제 쉽게 부러질 것 같은

각목, 나는 각목으로 광목같이 펼쳐진

눈 내린 들판을 후려칠 수 있을까

 

 


 

 

백상웅 시인 / 매화민박의 평상

 

 

네모난 짐승이 매화나무 그늘을 등에 업고 기어간다

부러진 한쪽 다리를 벽돌로 괴고도 절뚝이지 않는다

발바닥이 젖어 곰팡이가 피었는데 박박 긁지 않고

마당에 네 개의 발자국을 천천히 찍고 있다

나도 짐승의 널따란 등에 그늘보다 무겁게 엎드린다

짐승은 매화나무 그늘을 담벼락 쪽으로 밀어낸다

틀림없이 한곳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처럼 숲속에서 도망쳐 매화민박에 묵었을 짐승,

평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납작 엎드려 단잠에 들었다

등허리에 문신처럼 박힌 나이테가 성장을 멈춘 것은

놀러온, 도망친, 연애하는, 슬픈, 엉덩이 때문은 아니다

숲을 떠난 나무가 뿌리를 찾기 위해 남겨놓은 증거이다

네모난 짐승이 햇볕을 향해 남몰래 발자국을 뗀다

네모난 황소 같은 평상이, 평상이 될 것만 같은 나를

단단히 엎고 숲속으로 돌아갈 것 같은 매화민박이다

 


 

백상웅 시인 / 마루 밑

 

 

 어느 대에서 잃어버렸을 신발 한 짝과 신발을 찾던 쪼개진 장대와 수년 전부터 이어받았을 거미줄과 자루 부러진 삽과 두어 삽 퍼내고 싶은 어둠과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를 바람과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잎사귀가 있다. 옹이 빠진 구멍으로 쏟아지던 빛과 계절마다 색이 다른 먼지의 퇴적층과 그 위에 찍힌 개발자국과 마루 위에서 주저앉아 쏟아졌을 한숨이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를 가족이 초저녁에 막차를 기다리던 마을로 이주했을 때다. 마루 밑에서 들려오는 먹먹한 소리와 처마에 달린 알전구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이에 눈이 날렸고 발목까지 쌓이고 나는 뜨거웠다. 그렇게 스물에 마루 위에 앉아 서른을 기다렸다.

 

 


 

 

백상웅 시인 / 적설

 

 

입동과 소설 사이 별일 없는데 저벅하게 눈 쌓이는 냄새가 난다.

소식 멀었는데 이불 속까지 목도리 같은 바람이 분다.

이태 전 소한 지나 한 여자에게 고백을 하고 손을 잡았다.

한 살씩 늙어가는 골목에 그렇게 두 해 치의 눈이 쌓였다.

서로 다른 누군가의 발뒤꿈치를 보고 걸으며 사랑한 적이 있다.

현관문 앞에서 눈물 닦다가 소매에 살얼음 낀 적이 있다.

한 여자와 내가 밟아온 적설의 무게가 늘어나는 냄새가 난다.

시소처럼 흔들리던 젊은 골목이 두 발자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

 

 


 

 

백상웅 시인 / 직선

 

 

나는 직선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각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고

끝이 막막해도 계산이 선다.

 

장대비가, 전봇대가, 자유로가

지난 사랑과

아홉시와 여섯시까지의 시간 같은 게 여기에 속한다.

 

그것은 커브가 아니고 말줄임표가 아니고 슬픔이 아니다.

생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단칼에 자른 마음이다.

 

그것은 직진이고 편을 가를 때 쓰고 파울라인이다.

한 번 돌아선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별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리멸렬하다가

선을 긋고 화가 나고 차갑고 밤새 생각을 잇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끝이 있고

고개 숙여 등골 휘는 삶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상웅 시인 / 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

 

 

가끔 있다, 노력해도 이룰 수 있는 삶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저녁이.

마흔이며 쉰 너머의 한계가 보이는

늙은 호박 같은 저녁이.

 

퇴근길에 고향 친구랑 한 십 년 만에 통화하다가,

스물 넘고서부터 패배한 날들을 알린다.

 

둘 다 부족해서 여자에게 한두 번씩은 차였다.

너는 공무원 시험, 나는 신춘문예에

수 해 죽만 쑤다가

다 때려치우고 가끔 마른 넝쿨처럼 울었다.

 

취업하고 첫 월급 받아보니 그 끝이 아찔하니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미처 따지 못하고 늙어버린 저녁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절 바뀌어 폭설에 파묻힌

얼어붙은 저녁이 와도,

내가 무능해서, 인생 내가 잘못 살았다고

자책하는 날이 왔다.

 

네 아버지 내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수 없이

늙어갔을 텐데, 하며

수긍하는 저녁이 굴러왔다.

아비들의 그런 텅 비고 주름진 저녁에 바람은 좀 불었을까,

 

늙은 호박을 부러 밟은 적 있다.

 

 


 

백상웅 시인

1980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2008년 〈각목〉 외 3편으로 제8회 <창작과 비평>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거인을 보았다』.